ADVERTISEMENT

손자 위해 쓴 366장의 인생편지 시인 할머니의 절절한 내리사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3호 26면

저자: 김초혜 출판사: 시공미디어 가격: 1만3800원

손자가 예쁘고 대견하지 않은 할머니가 있겠느냐마는 ‘사랑굿’ ‘어머니’의 시인 김초혜(71)에게 손자 재면은 각별한 존재다. 돌 지난 지 얼마 안 돼 『발명왕 에디슨』동화를 듣고 냉장고 속 달걀을 담요로 덮으려 해 할머니는 물론 할아버지 조정래 작가까지 탄복하게 한 아이다. 그런 손자를 위해 할머니는 의미 있는 선물을 준비했다. 아홉 살이 되던 2008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편지를 쓴 것. 어릴 적 오빠에게 받아 평생 곁에 두고 지낸 『톨스토이 인생독본』처럼 손자가 두고두고 읽으면서 삶의 영양분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을 빨간색 가죽 노트 다섯 권에 꾹꾹 눌러 담았다. 중학생이 된 것을 기념해 손자에게 선물한 이 노트가 정갈한 한 권의 장정판 책으로 묶여 나왔다. 김 시인은 “책으로 나올 줄 알았다면 중언부언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 그날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일기처럼 적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수줍게 말한다.

『행복이』

매번 ‘사랑하는 재면아!’로 시작하는 일기 같은 편지는 “잘 때 꿈도 꾸지 마라. 깊은 잠을 방해하는 꿈이 너를 피곤하게 할까 봐 걱정”인 할머니의 어린 손자에 대한 연서(戀書)다. 그 연서에는 삶을 관조하고 통찰하게 된 시인의 지혜가 그득하게 배어 있다.

“검소와 인색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아무리 검소해도 검소함으로 끝나지만, 남에게 검소하면 인색이 된다. 인색은 인간의 도리를 그르치게 된다. 검소와 인색은 오른손과 왼손의 차이가 아니라 선과 악의 차이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거문고의 맑고 고운 소리는 줄의 강약을 잘 조절해야만 나온다고 하는구나. 무작정 강하게 튕기면 줄이 끊어지고, 약하게 튕기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단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중도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더구나. 중도라는 것은 어중간한 자리에서 엉거주춤 회색분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고, 객관적인 판단을 명확히 하여 균형을 잘 잡는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마음을 잘 운전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다. 항상 품위와 절제를 잃지 않고 일생 동안 자기 정진과 정화에 힘쓰다 보면 너는 네가 미처 생각도 못한 열매를 얻을 것이다.”

실질적인 조언도 적지 않다. 평소 사과와 양배추를 꼭 먹을 것, 식사할 때는 20번 이상 씹어먹을 것, 숨은 입으로 쉬지 말고 코로 쉴 것, 글씨는 정성 들여 쓸 것,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남에게 돈을 꾸어볼 것 등이다.

편지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평소 책 읽는 습관을 가져라”다.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을 만끽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책은 여러 번 읽을 것을 권한다. 어린 손자에겐 아직 어려울 수 있는 술과 담배, 여자, 죽음 등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눈길을 끈다. “언제나 따뜻한 잠자리에 든다는 생각만 하지 말아라. 차가운 잠자리를 네가 덥혀서 자야 한다는 생각도 하기 바란다”나 “승리는 의지의 산물이지 경쟁의 산물이 아니다. 남을 이기는 방법은 남을 이기지 않으려는 생각이다” 같은 말은 거친 세상과 맞서야 하는 젊은이들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제목은 손자가 어릴 적 만든 공작 숙제에서 따왔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려무나. 그러나 네가 다 취하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욕심은 어쩐다냐”는 시인의 내리사랑은 ‘행복’이라는 말의 다른 이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