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본 축은 무엇인가|성병욱 (본사 논설 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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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30여년간 미국은 한국의 제1우방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국이 처해 있는 지정학적 여건에서나 동북아의 안정을 유지해야 할 미국의 필요에서나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적극적 역할은 계속 불가결한 것이다.
한반도는 서로 믿지 않고 두려워하는 일·중·소 3대국의 이해 관계가 맞부닥치는 교차점이다. 이들 세나라는 경쟁적으로 다른 두나라의 한반도 침투를 견제하면서 한반도를 자국의 압도적 영향하에 두려는 정책을 견지해 왔다.
지난 세기말과 금세기초 청·일 및 로·일 전쟁으로까지 발전된 이러한 각축적 양상의 본질은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턱이 없다. 기본적으로 한반도가 어떤 득점 세력의 압도적 영향하에 들게 되면 그만큼 여타국의 불안은 증대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변 3대국이 한반도를 그 영향하에 두려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지속적 불안 요인이다.
주변 3대 세력의 경쟁적 욕심을 억제하기 의해선 우리 스스로가 강력한 힘을 길러 저지하는 방법과, 주변의 3강이 상호간에 세력 균형에 합의를 보는 방법, 그리고 제3의 강력한 세력이 조정·균형자적 역할을 맡아주는 세가지 길이 상정된다.
그러나 이중 앞의 두가지 방법은 보완 요인은 되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 우선 우리가 강력한 힘을 기른다는 것이 부분적인 억지 요인은 될지 몰라도, 주변 3인국의 각축을 우리 삶의 터전에서 완전히 몰아낼 정도가 되겠느냐 하는 것은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것은 우리의 터전에서 주변 세력의 각축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 조건일지언정 충분 조건은 못된다는 것이다.
또 3강의 합의를 통한 균형 유지도 견고한 방편이 아니다. 이들 세나라는 최근의 역사를 통해 상대방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더구나 이들간에는 문화적으로 공통된 바탕이 없거나, 파괴되었기 때문에 세력 균형이란 정교하고 미묘한 「게임」을 수행해 나갈 바탕이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보다 확실한 방법은 제3의 강력한 세력의 조정 역할에 기대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미국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선 미국은 일·중·소와는 달리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다.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경쟁에 관한한 일·중·소 3국이 상호간에 갖는 경계심보다는 미국에 대한 각국의 경계심이 덜 뿌리깊다.
일본이 중·소의 세력을 한반도 휴전선에서 미국이 막아주는데 대해 만족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중·소도 일본의 강대하게된 군사력과 맞부닥치게 되느니 차라리 미국이 이를 군사적으로 대항해 주는 것을 덜 위험하게 여긴다는 것도 하나의 공론이다. 심지어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사력을 뺌으로써 새로운 분쟁의 소지를 만들어 일본을 군사적으로 분기시키고, 중·소의 북괴에 대한 영향력의 현상을 변화시킬까봐 우려한다는 관측마저 없지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변의 세나라보다는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에 대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동시에 미국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록 최근 「아시아」에 대한 개입이 축소되긴 했지만, 일본의 방위를 주축으로 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의 유지는 여전히 미국의 국가 이익에서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동북아에서 안정을 유지할 힘이 있을 뿐 아니라 그럴 의사도 계속 지니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의 관건이 바로 한반도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없이 미국의 정책 목표인 동북아의 안정이란 구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망상이다.
바로 여기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동북아의 평화, 안정의 유지란 두가지 명제는 공통의 해결점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현존이다. 이러한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역할은 한국과 미국의 깊은 신뢰와 특별한 우호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 새 행정부의 출범을 전후해 한미 관계는 분위기를 흐리는 몇가지 사건과 함께 도덕 외교니, 주한미 지상군 철수니 해서 새로운 조정의 진통을 겪는 중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 과정에서 미국의 힘에 의한 조정 역할과 한미 우호 관계가 결코 일시적이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국의 조정·균형자적 역할이 주한미군의 수효가 줄어든다고 해서 손상될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조정의 능력과 의사를 의심받을 정도여서는 곤란하다.
한미간에 제기되고 있고 또 앞으로 제기될 모든 문제가 한미 우호에 바탕을 둔 미국의 조정·균형자적 역할을 기본 축으로 해 논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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