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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밤이 없는 백야의 북극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저녁엔 이 서「스피츠베르겐」보다 더 북쪽에 있는 북빙양의 부빙을 보기 위해 「막달레나·피요르드」에서 여객선이 정북 쪽으로 향했다. 백야가 계속되는 이 북극해에서는 밤에도 해가 줄곧 떠있기 때문에 밤과 낮의 구별이 여간 어렵지 않다. 다만 낮에는 남쪽에 보이던 해가 밤에는 북쪽에 보이며 또 낮에는 그림자가 짧으나 밤에는 햇빛이 23.3도로 비스듬히 비치기 때문에 그림자가 매우 길어지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밤이 없는 세계에 살면 밤잠도 낮잠처럼 착각하게 된다. 「남가일몽」아닌 「백야일몽」이란 말이 나옴직도 하다.
배가 「막달레나·피요르드」를 빠져나와 바다로 나가게되자 이 서 「스피츠베르겐」의 만년설이 뒤덮인 빙??며 얼음속에 바위봉우리들이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더욱 장엄해 보였다.
이 북극해에는 「플랑크톤」(부유생물)이 많이 번식하는데 이것을 먹기 위하여 청어들이 몰려들며 대구는 이 청어가 깐 알을 잡아먹기 위하여 모여든다. 그리고 고래는 곤쟁이를 잡아먹기 위하여 북대서양에서 북해로 모여든다. 여름철에는 이 북극해가 짧은 기간이지만 고기잡이로 흥청거린다.
서「스피츠베르겐」서 북단에 있는 「스메렌부르크·피요르드」앞에는 「단스크」섬과 「암스테르담」섬이 보이는데 이것은 이 이름이 말하듯 각기「덴마크」사람과 「네덜란드」사람의 어업기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은 「노르웨이」의 국력이 약했던 17세기에 광물유를 발견하기 이전에는 경유가 경제적인 가치가 컸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고기잡이의 근거지로서 번영했었다. 당시에 이 둘레에는 고래며 바다표범이 들끓었는데 선박들은 「멕시코」난류를 따라서 깊숙한 이 북극해에 쉽게 돌 수 있었다. 17·18세기에는 고래잡이의 절정기였으며 여름철에는 몇 천명의 고기잡이들이 활약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섬에는 3백년 전 여기 와서 희생된 「네덜란드」사람인 남녀의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의 묘비가 있다. 여자들은 포경업자들의 가족일 것이다.
「스메렌부르크」항구에는 몇 백명의 고래잡이들과 더불어 1천2백여명의 사람들이 들끓었는데 길이 80m·폭 25m나 되는 2층집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막사들이 많았고 교회·빵집·술집도 있었으며 매춘부들까지 와 있었다고 한다. 이같이 북극해 고래잡이의 파시가 얼마나 흥청거렸던가를 알수 있다. 이런 섬에 특히 매소부가 오는 것은 개척시대에는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이런 북극에까지 와서 추위는 아랑곳없이 씩씩한 고래잡이들의 육욕의 대상이 되어주었다는 것은 유독 갸륵해 보였다.
화가 「로트렉」이나 조각가 「로뎅」은 매소부를 소재로 한 걸작들을 남겼지만 이 북극에서의 매소부의 생태를 소재로 했더라면 더 뛰어난 걸작이 나왔음직도 하다.
「스메렌부르크」포구에는 자기나라 포경업자들을 지키기 위한 보루까지 쌓았던 자리도 있다. 이 때 얼마나 여러 나라가 고래잡이의 쟁탈전을 벌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고래잡이를 둘러싸고 피를 흘리며 싸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고래가 얼마나 많던지 가장 흥청거렸던 1세기 동안에 잡은 고래의 수는 6만여 마리였다고 한다. 따라서 2백여척의 포경선이 북극양에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18세기초부터는 「노르웨이」인·영국인·「러시아」인들 까지 진출하여 고래를 마구 잡아서 줄어든 데다가 1864년에 「노르웨이」의 한 포경선장이 오늘날 쓰이는 「노르웨이」식 포경포를 발명한 이후 20세기초에는 1년에 1천 마리 꼴로 오랫동안 많이 잡은 데다가 고래들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했기 때문에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피츠베르겐」은 아직도 중은 포경어장으로서 여기저기서 고래잡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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