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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세상|박갑성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주위의 한사람이 심한 화상으로 불행한 일을 당했다. 다리의 상처가 깊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목숨까지 잃느니 차라리 다리를 절단해버리고 생명을 건지는 일이 옳다고 생각되어 수술을 했다. 당사자는 아직 자기의 몸이 그렇게 된 것을 모르는 채 병상에 누워있다. 「없어진 다리」가 무겁고 발바닥과 발가락이 가렵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나」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뿌리가 깊은 것이고 그것은 육체적인 범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제 이러한 고통은 상처가 아물듯이 차차 망각되어 갈 것이고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휠체어」와 함께 살아갈 새로운 용기를 얻어야할 것이고, 따지고 보면 그것은 시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쓰는 안경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낙천적인 신념과 더불어 「휠체어 인생」의 새로운 환희 같은 것을 발굴해 가야할 것이다.
새삼스럽게 나는 외국에서 무심코 보아 넘긴 「휠체어」를 위한 특수한 화장실이 생각난다. 열차 역이나 고속도로 연변의 휴게소에 그러한 시설이 있는 것을 가끔 보았다.
그뿐 아니라 원시림같이 광대한 공원 속의 「캠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장실에도 그러한 특수한 시설이 마련된 것을 보고 약간 의아스러운 느낌까지 가진 일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 소화기구처럼 1년 내내 쓰이는 일이 별로 없겠지만 그럴수록 이것은 귀중한 시설이고 인도적인 배려라고 생각된다. 경기도 전체면적보다도 넓은 주립공원을 설계할 때 이런 것까지 고려된다는 것은 분명히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권리 같은 것을 존중할 줄 아는데서 마련된 것이라고 하겠다. 단순히 물자가 풍부하니까, 여유가 있으니까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고 보면 적자생존이니 자연도태니 하는 사상을 인간세계에다 적용하는 생각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그것은 아마생물의 진화법칙을 연구하는데서 생겨난 논리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그저 생물 혹은 동물이라고 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법칙을 인간사회에까지 불화 중에 적용하게된 것 같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단순한 생물이나 동물의 집단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는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병원시설과 거기에 종사하는 전세계의 의료진은 그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그뿐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 모든 교육자들과 그 기관들도 없어져야 할 것이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법률도 필요없을 것이다. 정치도·경제도 뜻 없는 것이 된다. 총탄에 쓰러진 전우를 어깨에 메고 적지를 탈출하는 용사의 모습도 아무런 감정 없는 어리석은 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적자생존이란 말만큼 비인간적인 말은 없다. 이것은 생물학의 말이지 인간학의 말은 아니다.
인간의 사이는 단순한 자연계보다 높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인간계는 서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설로 덮인 독일의 산악지대에 있는 자그마한 대학도시에서 공부하는 한 학생이 눈길을 같이 거닐면서 『눈 위에 뿌려진 이 모래는 눈에 미끄러져서 길가는 사람이 다치면 시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때문에 뿌려진 것입니다』하는 말이 생각난다.
독일 모래는 가뭇가뭇하고 콩알만한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져야하고 또 그것을 담당해야 할 능력이 있다고 나서는 인간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시 행정자는 그러한 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아까 하체를 절단하게된 내 친척이 화상을 입게된 원인인 즉 오래된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불로 「메탄·가스」가 폭발하는데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 혹은 앉게될 사람, 아니 약한 모든 사람들이 도의적 책임과 사회적인 보상으로 아무런 불편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우리가 염원하는 귀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필자>소개 ▲1915년 충남 천원 태생 ▲38년 일본 상지대 철학과 졸 ▲50년∼68년 서울대 미대 교수 및 학장 ▲현재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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