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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풍요는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세계의 대도시 어디를 가보아도 자동차와 사람의 물결로 넘쳐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처럼 사람들의 물결로 메워져 있는 곳도 드물다.
골목은 어린이들로 가득 차 있고 아침의 「버스」는 학생들로 메워 있고 저녁의 도심은 재수생으로 꽉 차 있다. 그리고 명동거리는 여러 층의 사람들로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군상 가운데서 가끔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경우도 본다. 이런 경우를 볼 때마다 앞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땅덩어리는 제한되어 있고, 그 위에 인구는 폭발할 듯 증가하기 때문에 자연히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 도시에 이르기까지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더우기 농촌과 지방 도시로부터 수도 서울로 밀려들기 때문에 오늘의 서울은 더욱 숨이 막힐 것 같다.
우리 나라 전 인구의 5분의 1이 서울에 몰려서 살고 있다. 대개 수도는 인구가 많아야 그 나라 전 인구의 10분의 1정도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서울의 인구 비율은 다른 나라 수도 인구 비율의 배나 된다.
오늘의 서울 시민의 생활은 하나의 공동체적 집단 생활이 돼 버렸다. 도시 공동체의 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다. 현대 도시는 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 도시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질서의 하나는 교통 질서다. 도시인은 교통 질서가 몸에 베지 않고는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 공동 생활에 있어서는 사회 질서를 지켜야 한다. 사회는 질서가 무너질 때 교통망이 무너진 것 같이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사회 질서는 성문율도 있지만 대개는 불문율과 관습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것은 시민의 교양과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도시민의 생활로서 중요한 것은 예의라고 생각한다. 예의는 서로 상대방의 인격을 자기의 인격과 같이 존중하는데서 이루어진다. 예의는 봉건 사회에서와 같이 어린 사람이 어른에 대하여, 또는 아랫사람이 웃사람에 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사회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인격적인 평등 속에서 대하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예의 생활이 이뤄질 때 우리 사회는 갈등과 대립이 좀더 해소 될 줄로 믿는다.
한편 이 모든 질서와 예의를 원만히 이루어 나가는데에는 「존경」이 필요하다. 기계에 기름이 있어야 원만히 돌아가는 것과 같이 사회의 질서와 예의는 상호 존중으로써 원만히 지켜 나갈 수 있다. 한국 사람의 얼굴에서는 흔히 찌푸리고 성낸 듯한 무표정, 아니면 노기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어지러운 현대의 생활일수록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믿으며 미소짓는 생활 자세가 요구된다.
구미를 여행할 매마다 마음 깊이 느끼는 일이지만, 그들은 어딘지 활달하고, 밝고 진취적인 것 같은 인상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물질의 풍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마음의 풍요가 더 앞서는 것 아닐까. 좋은 환경이 있어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풍요가 없으면 박제된 환경이나 다름없다.
나쁜 환경일지라도 그것을 참고 살아가는 슬기로움이 없으면 이것은 더욱 삭막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마음의 거울을 닦는 의연하고 겸허한 자기 결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필자>
▲56세·전북 익산 출생 ▲평양 신학교 졸·미 뉴요크 유니언 신학대 조 ▲대한 기독교 교육 협회 감사 ▲예장 (통합) 총회 총무 ▲저서 『기독교 교의』 ▲역서 『성서와의 대화』『평신도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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