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의 새 주인 「지미·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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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지미·카터」라고 하는 사람으로 대통령에 출마할 생각입니다. 나는 농부이자 기사이며 실업가이고 기획가, 과학자이며 주지사를 역임했고 또 기독교도입니다』-.
74년 12월 「워싱턴」에 올라온 전 「조지아」주지사 「카터」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카터」란 도대체 누구인가?』 불쑥 나타난 이 무명의 지방정치인에게 놀라움과 호기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케네디」식의 머리형과 독특한 웃음을 띠고있는 그는 「하버드」대 출신도, 법률가도 아닌 동부 「엘리트」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순수한 남부출신으로 정치경력이라고는 「조지아」 주지사 역임이 고작이었다. 「워터게이트」사건, 월남전 패배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미국사회에 「도덕적 가치관」을 내걸고 부패하고 타락한 「워싱턴」정계를 공격하고 나선 그는 순식간에 새로운 바람인 「카터」현상』을 몰고 왔다.
「케네디」의 「프런티어」정신, 「존슨」의 「위대한 사회」같은 이상과 목표를 제시하지는 못해도 3세기로 접어드는 미국이 새 인물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구호를 내걺으로써 미 국민의 공감을 산 것이다.
1924년 선조 대대로 살아온 「조지아」주 「플레인즈」읍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남부농업사회의 전통적인 소박함과 침례교 신앙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8세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던 그는 인종차별 주의자인 아버지보다는 간호원 출신으로 흑인의 간호에 헌신적이었던 어머니 「릴리언」여사(78)의 영향을 받아 후일 주지사였을 때 흑백혼합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10년 간 해군생활을 했던 그는 52년 부친이 사망하자 제대, 부친의 땅콩 경작사업을 떠맡았다.
62년 37세 때 주 상원의원에 출마, 고배를 마셨으나 부정선거임이 밝혀져 실시된 재선거로 당선, 정계에 나섰다.
주 상원의원 2기역임 후 민주당지사공천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인종분리주의자인 「레스터·매독스」에게 패배했다. 70년 주지사에 당선될 때까지 4년간의 정치공백기 동안 주 내를 돌아다니며 꾸준히 기반을 닦을 정도로 집념이 강했다. 4년간의 주지사 때에 주 정부 개편·행정개혁·예산제도개편·흑인등용 등 진보정책을 펴 「새로운 남부의 대변자」라는 평을 들었다.
해군복무 때 결혼한 동향의 부인 「로절린」여사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고있는데 「로절린」부인은 남편이 주지사로 있을 때 땅콩농사를 맡아했고 선거운동에서는 남편과 동행, 남편과 똑같은 횟수의 연서를 하는 등 억척스런 내조로 「무쇠여사」라는 평을 들었다.
그의 정치성향은 선거초기에 강한 진보주의 경향을 드러냈으나 곧 지지기반의 확대라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만병통치 식의 모호한 정책 뒤로 숨어버렸다. 그의 초기 진보주의적 색채가 집권 후에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가 「카터」가 안은 최대의 수수께끼이다. <김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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