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도 과세 … 70년 전 잘못 바로잡은 여대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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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전쟁기록연구소 건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여대생 하를로터 판덴베르흐. 유대인에 대한 부당한 세금 징수를 고발, 보상까지 이끌어내는 데 공헌했다. [암스테르담 AP=뉴시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네덜란드에선 14만 명의 유대인 중 75%인 약 10만5000명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5000여 명에 불과했다. 가까스로 네덜란드로 돌아온 이들은 기가 막힌 청구서를 받았다.

 그동안 밀린 주택세(토지 임대료)와 가스요금 등을 내라는 독촉장이었다. 유대인들은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관료주의에 찌든 당국엔 예외가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만 1450만 달러(약 150억원)가 징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의 이면에 묻혀 있던 이 사실이 최근 한 네덜란드 여대생의 3년에 걸친 집념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19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2011년 하를로터 판덴베르흐(20)는 암스테르담 기록보관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놀라운 편지를 발견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이 암스테르담 시를 상대로 주택세 납기일을 미뤄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그가 끌려가 있을 동안 그의 주택은 나치 기관에 점거돼 사용된 처지였다. 하지만 당국은 “제3자 점유와 상관없이 세금과 연체료를 납부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판덴베르흐는 암스테르담 시의 전후 세금 징수 기록을 더 찾아봤다. 총 342건의 유사 사례가 나왔다. “이 같은 기록을 지나칠 수 없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불의가 행해진 것이었다.” 그는 시 관계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시 당국은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시간만 흘렀다. 오히려 이 편지 기록들이 디지털로 보관되고 원본은 파기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판덴베르흐는 지난해 5월 지역 일간지 ‘파룰(Parool)’을 통해 이 문제를 폭로했다.

 보도가 반향을 일으키자 암스테르담 시는 네덜란드 전쟁기록연구소(NIOD)에 서류를 검토하도록 했다. NIOD는 당시 세금 납부를 거부하던 217명의 유대인에게 676만 달러를 거둬들인 사실을 확인했다. 순순히 낸 사람들까지 합치면 징수액이 1450만 달러에 이르렀다. 기록에 따르면 시는 자문 변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징세를 강행했다. “한 번 예외를 인정하면 계속 꼬리를 문다”는 이유에서였다.

 NIOD는 조만간 공개할 보고서에서 암스테르담 시로 하여금 관련 생존자와 유가족에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권고할 전망이다. 연체금에 대한 보상금 40만 유로와 사용하지 않은 집에 대한 세금 환급금 450만 유로 등 총 490만 유로(약 70억2000만원)에 이른다. 판덴베르흐는 “보상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 같은 결과가 나와서 기쁘다”고 AP통신에 말했다. NIOD 보고서 검토에 참여한 네덜란드 유대인회도 그녀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감사를 표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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