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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10>'무릉도원' 도연명의 한마디 "남의 아이도 귀한 자식이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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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산수화 속 아이는 무심하고 천진하다. 노송 밑에서 바둑을 두는 두 노인, 그리고 옆에서 차를 달이느라 부채질을 하는 아이, 혹은 나귀를 타고 산속을 향하는 선비의 곁을 따르는 술병을 든 아이, 우리의 눈에 익숙한 산수화의 여러 구도 속에서 아이는 고매한 그림의 경지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한 정물로 자리 잡았다.

 문학에서도 아이는 동일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조의 종장에 등장하는 ‘아이야, 운운(云云)’의 후렴구는 그 시의 순박한 정조를 고양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아이의 심성에 대한 고대 동양사상가들의 성찰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성선설(性善說)을 제창한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사람이란 아이 때의 그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맹자』 ‘이루(離婁) 하(下)’)

 사람이 날 때부터 착한 심성을 지녔다는 관점에서 보면 아이야 말로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본성을 지닌 존재이다. 어른이 돼서도 그런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유가와 대척점에 있는 도가의 시조 노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덕을 두텁게 품은 사람은 아이에 비할 만하다. (含德之厚, 比於赤子)”(『도덕경(道德經)』 제55장)

 고대 동양사상가들의 이러한 관념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W Wordsworth)가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고 노래한 생각과 별로 다름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 다시 산수화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신선 같은 어른들의 고상한 경지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서의 아이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필시 불우한 아이들일 것이다. 종의 자식이거나 부모를 일찍 잃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의 신세가 돼 어른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 신선 같은 어른들이 자신의 귀한 자식으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첩첩산중으로 끌고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산수화를 그리거나 감상하는 어른들은 아이에게 그들의 고매한 이상을 투사하지만 이 불우한 아이들의 삶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기묘하지 않은가. 이 엄연한 현실에도 그 어느 산수화가도 고단한 표정의 아이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고고한 은일(隱逸)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을 그린 ‘연명취귀도(淵明醉歸圖)’ 역시 천진한 아이가 국화꽃을 따 들고 취한 시인을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행히 이 위대한 시인은 그림 속 정물이 된 불우한 아이들에 대해 현실에서 깊은 동정을 표했다. 빈궁한 아들의 살림을 돕기 위해 아이 종 한 명을 보내며 도연명은 이러한 편지를 썼다. ‘이 아이 또한 남의 집 귀한 자식이니 잘 대해주도록 해라.(此亦人子也, 可善遇之)’(『남사(南史)·은일전(隱逸傳)』)

노예제가 엄존했고 아동인권 의식이 박약했던 고대에 이러한 발언은 참으로 경이롭다. 단언컨대, 그 어떤 훌륭한 시구(詩句)도 이 한마디를 넘지 못한다.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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