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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의 온건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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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에서는 49년 건국 이후 유소기 전 국가주석을 정점으로 한 실무당료파와 주은래 전 수상이 이끄는 실무관료군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체로 국가통치에 있어 중국의 전통적인 실용주의적 방법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택동이 58년부터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기 전까지는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모의 이 야심적인 계획이 실패하고 60년대초부터 유소기·등소평 등이 실권을 잡아감에 따라 중공전문가들은 이들 양자를 모의 강경 노선에 비교해서 온건파 또는 실권파로 분류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66년부터 시작된 문혁에서 이들이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비판 받으민서 유·등계의 실권파가 몰락함에 따라 이들 실권파와 구별하여 주휘 하의 관료 군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체로 온건파들이라고 하면 이념적면에서 좌·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경제건설에 역점을 두고 정책을 집행했던 주휘 하의 실무관료파들을 지칭하게된 것은 문혁 때부터다.
이들은 문혁에서도 주의 비호를 받아 치명적 타격은 받지 않았다. 현재 당정치국에는 엽검영 부주석을 비롯, 이선념·위국청·진석련·유백승·허세우(이상 정치국원)·보복정·소진화(이상 후보위원)와 국무원에는 이선념을 우두머리로 하여 왕성·여추리(이상 부수상)·엽검영(국방부장)·사풍(농업부장)·왕양 (제7기계공업부장)등 절대다수의 실무파 관료 군이 온건파들로 알려져 있다.
군부에는 율유(국방부 부장 겸 부총참모장) 장종손(군후근부총참모장)등을 비롯, 11개 군구의 9개 군구사령들이 온건파로 알려져 막강한 힘을 갖고있어 문혁시에도 모는 이들을 크게 건드리지는 못했다.
모가 설령 이들을 제거할 수는 있었다고 한들 이들 없이 중공의 통치가 순조롭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모 자신이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주의 건의에 마라 이들을 방임했었다.
그런데다 주휘 하의 온건파들은 유소기·등소평계의 실권파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모에 도전하지도 않았고 다만 모의 홍(이념)우선 주의를 따르면서도 당면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집행에 더 역점을 두고 실행, 모·주의 이상적 경합의 받침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 온건파들이 득세한다 하더라도 근대화노선에 더욱 역점을 두면서도 이념투쟁을 무시하지 않은 고 주은래의 온건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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