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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문민정권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태국의 문민정부가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쿠데타」의 주역인「상아드·찰라우」제독은『태국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왕정을 보호하기 위해』이번 거사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동남아와 같은 위험한 지역에서, 뚜렷하고 강력한 반공이념에 입각한 통치철학을 실천하는데 실패한 우유부단한 정권이 자초한 비극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자유국가로 존속하겠다는 나라가 강력한 반공전략은 커녕 무턱대고 미군을 철수시키고 중공·월맹에만 추파를 던진 무책임한 무력정권이 더 이상 유기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생들의 질서 교란적인 급진행동은 결국 군부의 그와 같은 우려와 불만을 폭발시키는데 절호의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다. 만약에 학생들이 그런 가능성을 미리부터 예상하여 스스로 행동을 자제했더라면 사태는 다소 달라졌을 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 태국 문민파와 학생들의 정치적 무책임과 미숙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타놈」정권이 붕괴된 시기를 전후해서 태국에는 시급히 해결했어야 할 과제들이 허다하게 산적해 있던 것은 사실이다.
누적된 부조리를 시정하고 도시와 농촌의 빈궁격차를 줄여 가는 따위의 어려운 과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또 주변국가의 공산화에 따른 새로운 외교적 적응을 모색하는 일도 심각한 갈등과 충격을 일으켜 놓았다.
그러나 그러한 엄청난 사회적 변동들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룩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세니」수상의 우유부단한 문민정부는 그런 일들을 일사천리로 소신 있게 추진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었다. 비록「타놈」이 부각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전통적인 지배세력은 의연히 태국의 사회적 기득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을 반대해서 조급히 어떤「변동」을 추진했다가는 의외의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세니」정권의 감시자라 할 수 있는 학생들의「변동」요구를 전적으로 묵살할 수 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세니」문민정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원외에서는 반공세력과 학생 급진파간의 유혈충돌이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타놈」을 비롯한 망명 군인들의 국내잠입으로 양측간의 격돌은 총격전으로까지 번졌다. 바야흐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에 적절한 사회기반이 무르익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지 않아도 동북부를 거점으로 한 공산「게릴라」준동이 격파되고, 「인도차이나」의 적화에 뒤따른 주태 미군의 철수조치는 군부와 일반 국민의 반공 위기감을 극도로 자극한 뒤였다. 주변 공산세력의 힘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마당에 태국민정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미군을 조급하게 철수시키고 만 것은「세니」정권과 학생 일부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 문민파가 모처럼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가치를 아낄 줄 모르고, 그와 같은 경솔과 급진성을 자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부「쿠데타」는 주저 없이 일정한 명분과 정당성을 주장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6·25동란이래 우리하고는 깊은 맹우 관계를 맺은 태국국민을 위해 우리는 새로 발족한 군정이 헝클어진 법과 질서를 신속히 바로잡고 태국의 안보위기를 극복하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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