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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서해훼리호 너무 쉽게 잊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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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1993년 10월 초순 군산 공설운동장. 이곳에서 필자는 시신 수를 집계해 서울 편집국에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군산 인근 위도에서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출장을 간 것이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사건으로 봤다. 첫날 40여 구가 도착했다. 둘째 날은 그 수가 100구를 넘어섰다. 일주일간 시신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서해훼리호의 탑승정원은 220명, 생존자는 70여 명 있었다. 사망자가 150명을 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최종 사망자는 예상의 두 배인 292명이나 됐다. 역대 최악의 해양사고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사고원인이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현장기자는 할 말을 잃어갔다. 우선 정원보다 141명을 더 태웠다.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불법 승선 때문이다. 배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비만해진 배는 높은 파도에 중심을 잡지 못해 뒤집어지고 말았다. 선장은 초속 13m의 강풍이 몰아치는데도 출항을 감행했다. 승무원들도 규정의 절반만 탔다. 책 한 권 분량의 문제점이 수집될 정도로 부실투성이였다. 12년이 흐른 2005년, 취재팀은 그날의 생존자 Q씨를 인터뷰했다.

 “바다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요동쳤다. 자동으로 터졌어야 할 구명정은 네 개 중 한 개만 작동했다. 운 좋게도 그 하나의 구명정에 올라타 살 수 있었다. 2년 넘게 악몽에 시달렸다. 지옥을 봤기 때문이다.”

 서해훼리호 사건 이후 해양사고 대책은 확 바뀌었다. 운행지침이 전면 개편되고 정원초과 단속이 깐깐해졌다. 처벌 수위 역시 크게 높아졌다. 그 이전과 이후 시대로 나눌 만큼 수많은 해양사고 방지책이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한동안 끔찍한 대형 해양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적어도 해양사고 후진국의 명단에서 코리아의 이름이 빠진 줄 알았다. 하지만 대(大)착각이었다. 진도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부끄러운 민낯이 또다시 드러났다.

 이번 참사의 정확한 원인은 시간이 더 지난 뒤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사고 첫날의 정황만으로도 윤곽은 드러났다. 선장과 승무원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출항을 감행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위험천만한 항로를 택했다. 선체가 기울고 물이 차 들어오는데도 승무원들이 신속한 대피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구조 과정에서도 기관 간에 손발이 맞지 않아 엉터리 정보를 쏟아냈다. 서해훼리호의 재판이다.

 대부분의 해양사고는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다. 국제해사기구(IMO)에 따르면 해양사고의 60% 이상은 인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해액 10만 달러 이상의 상선 사고 중 62%가 인적 오류로 일어났다는 자료도 있다. 선박 결함이나 급박한 기상변화, 경제적 원인 등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큰 문제를 막는 것도 사람이요,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다.

 최근 정부는 인공위성항법장치·알파레이더·선체감시장치·선박자동식별장치 등과 같은 첨단장비를 들여오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해양 종사자의 교육훈련이나 운영관리, 근무환경 개선 등을 장비 도입만큼 고민하지 않았다. 사람보다는 기계, 기본보다는 응용에 치중했다. 얼마 전에도 어선 화재가 잇따르자 해양수산부의 입에서 나온 대책은 “선박 자동식별장치 확대”였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사람이 사고를 치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우리는 서해훼리호 사건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지옥의 냄새와 광경을 가슴 깊이 새기지 않았다. 궂은 날에 출항을 멈추고, 안전한 항로를 규정대로 따라가며, 사고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상식과 기본을 또 까먹었다. 서해훼리호 생존자인 Q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럭낚시 하러 같이 갔던 동료 일곱을 잃었다. 유족들에게 죄인 아닌 죄인이 됐다.” 진짜 죄인은 따로 있다. 그날의 교훈을 망각한 정부, 원시적인 참사를 일으킨 사람, 관리·감독을 게을리한 기관은 어린 학생들 앞에서 모두 죄인이 돼야 한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