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라져 가는 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미국의 저명한 시사평론이 「J·크래프트」는 지금 중공을 방문중이다. 본사 주미특파원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상중인 북경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모의 처 강청의 동정이다. 「크래프트」는 강청이 장례식행사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사라져가고 있는 별-』. 「크래프트」는 그녀를 이렇게 표현했다.
후광이 사라지면 그 앞의 얼굴도 어둡고 적막해지게 마련이다. 강청도 차가운 권력의 현실에선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강청은 워낙 소녀시절부터(14세) 유랑극단의 단원으로 전전한 천애고아였다. 란숙몽·이운학·경빈 등 그의 번화한 이름들은 바로 굴곡 많은 그녀의 생에의 단면들이다. 강청이란 이름은 연안시절에 모택동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당조 중기의 시인 전기의 작품 중에 『곡종무인견, 강상수봉청』이란 귀절이 있다. 노래는 끝나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강물엔 산봉우리만 푸르게 비치네-.
강청의 전기를 쓴 사람들은 연안시대의 모와 강청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묘사하려고 에 쓰고 있다. 강청은 그 무렵 노신 예술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기 위해 연안에 있었다고 한다.
역시 이곳에서 동굴생활을 하던 모택동은 이른바 혁명학도들을 모아놓고 이념강의를 하고 있었다. 남적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던 강청은 그 학생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모의 강의를 들으며 유난히 많은 질문을 했고, 또 열심히 「노트」도 했었다고 한다.
어떤 전기가는 강청이 모의 시선을 끌려는 하나의 계략이었다고도 말한다. 어쨌든 모는「장정」의 동지이며 처였던 하사정과 이혼하고, 1939년 강청과 결혼했다. 모 주위에서는 이런 연사가 하나의「가십」이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일선에는 향후 20년 동안 「미세즈·마오」(모) 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결혼을 승낙했다는 얘기도 있다. 강청은 끝내 모를 놓치지 않았다.
강청은 군중 앞에 나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66년 8월18일 강청은 홀연히 천안문에 나타났다. 백만 명의 홍위병 앞에 비로소 권력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후 세계의「업저버」들 가운데는 강청이 모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특히 최근까지도 「모스크바」방송은 공공연히 그를 『모 이후의 제왕』이라고 빈정거렸었다.
아직은 중공의 모든 것이 구구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강청의 향배는 자못 궁금한 일 중의 하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