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슈추적] 경영계, 근로시간 단축 입법 버티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경영계가 근로시간 단축 입법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사업장별 사정에 맞게 노사 간의 자율적인 합의로 연장·휴일 근로시간을 정하는 방안을 강구키로 했다. 법적 규제에 얽매이기보다 자율 시행에 초점을 맞춘 선제적 행동이다. 다만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노동계, 정부, 정치권과의 쟁점 타결을 위한 대화는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이는 대법원 판결 이전에 노사정 간 합의로 법을 개정하겠다는 방침에서 선회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정부와 정치권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대법원이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킬 것처럼 예단하고 있다”며 “이를 근거로 조기입법하는 것이 기업에 유리하다는 논리로 경영계의 협조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현행법상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주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휴일근로 16시간)인지, 52시간(휴일근로 폐지)인지를 따지는 판결을 올해 초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노사정 논의가 시작되자 이를 미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김영배 부회장은 “대법원이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키는 취지의 판결을 하면 당장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여야 하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1991년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것인 만큼 통상임금처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 내용에 따라 전원합의체 판단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소 1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다. 91년 대법원은 휴일근로 8시간을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이를 근거로 당시 노동부는 93년 행정해석을 내놨고, 지금까지 적용됐다. 그러나 2012년 서울고등법원이 휴일근로 인정을 두고 엇갈린 판결을 내놔 근로시간 단축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부는 2013년 근로시간 단축을 국정과제로 정해 근로기준법 개정을 서둘러 왔다.

 경영계는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60시간으로 8시간 줄이는 데는 동의했다. 대신 기업 현실을 들어 속도를 조절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기업부담 경감, 노사합의 존중, 단계적 시행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S그룹 인사담당 임원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법 준수를 강요한다면 막대한 생산 차질과 무더기 법 위반 사태, 소송 남발, 노사관계 악화와 같은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을 중심으로 근로시간 단축 법 개정이 속도를 내면서 이런 경영계의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최근 경제단체 관계자 간담회에서 나왔다. “이대로 가면 입법이 되자마자 임금보전 투쟁으로 이어져 산업현장이 혼란에 휩싸일 것”이란 관측도 있었다.

 이에 따라 경총은 최근 ▶노사 합의로 자율적인 연장·휴일근로 확보 ▶휴일에 일하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한 소득보전 금지 ▶생산성과 연동된 임금 지급 등 3대 지침을 업계에 시달했다. 현장에서 자율적으로 근로시간을 정해 시행하는 분위기를 잡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고, 연월차 휴가를 소진토록 하는 등의 실질 근로시간 단축 방안도 독려키로 했다. 일본·독일·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근로 형태를 염두에 둔 조치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실근로시간은 연평균 2300시간이 넘었다. 그러다 2010년 1754시간으로 뚝 떨어졌다. 그런데 파트타임을 제외하면 연간 근로시간은 2009시간에 이른다. 상당수 근로자는 예전처럼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경총 이동응 전무는 “외국은 유연한 근로시간과 근로형태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며 “일률적인 근로시간 단축보다 유연한 근로가 가능한 법체계를 만드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노총 이정식 사무처장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빌미로 시간을 끈 뒤 현장에서 분위기를 잡아 유리한 국면을 만들겠다는 꼼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0년 노사정이 2020년까지 1800시간대로 근로시간을 줄이기로 합의했는데, 이제 와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국회 환노위 산하 노사정 사회적 논의 촉진을 위한 소위원회는 논의 시한을 당초 15일에서 17일로 연기했다. 소위는 이날 대표자 회의를 열어 의견을 조율했으나 경영계와 노동계, 여야 간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새누리당은 6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1년 중 6개월은 8시간의 휴일근로를 인정하자는 입장을 개진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016년부터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행하되 휴일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김기찬 선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