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륜 첫 영광…양정모의 수기(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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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돌이켜 보면 금「메달」까지의 길은 너무나 힘든 가시밭길이었다. 「매트」위에서 온몸을 비벼가며 상대방을 잡아 누르는 고된 훈련을 할때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특히 거울을 볼때마다 찌그러진 두 귀는 전율마저 느끼게 했다. 이럴 땐 항상 『찌그러진 두 귀는 금「메달」과 바꾸자』고 굳게 결심하곤 했다. 나는 이제까지 운동하는 동안 꼭 한번 크게 좌절감을 느껴봤다. 72년「뮌헨·올림픽」최종선발전에서 우승을 했으나 체육회의 소수정예원칙에 따라 밀려났을 때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동아대2학년 때인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대선배이고 국가대표였던 장경무선수를 꺾고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선수로「올림픽」에 출전한다는 생각으로 흥분했다. 그러나「올림픽」출전 탈락은 청천벽력이었다. 운동이고 뭐고 다 귀찮아졌다. 이때 술과 담배를 배웠다. 운동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레슬링」에 대한 증오심만 생겼다. 기로에 선 나를 격려해준 분이 대표단의 정동구「코치」와 동아대의 오정룡「코치」였다.
『앞으로 국내엔 널 당할 선수가 없다. 그러니 더욱 훈련을 쌓아「몬트리올」을 목표로 하라』는 두 분의 얘기였다.
5개월을 허송세월한 다음 다시「매트」에서 구르기로 작정했다.
이듬해「테헤란」서 열린 「아리아마」배 대회에 출전했다. 「페더」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다시 용기와 투지가 솟았다. 한번 내 인생의 승부를「레슬링」에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또 74년 제7회「아시아」경기대회에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세계선수권자인 숙명의 「라이벌」몽고의「제베그·오이도프」를 만났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세계정상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 했다. 75년에 들어 태릉선수촌서 본격적인 강화훈련에 들어갔다. 9월의「민스크」세계선수권대회와 이어 76년의「몬트리올·올림픽」까지 대비한 장기훈련이었다.
이때의 강도 높은 훈련은 어찌나 힘든지「레슬링」에 대해서 여러번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성실·연구·투지』를『마음의 훈』으로 하여 악착같이 훈련에 달겨 들었다.
다음은 어느날 나의 훈련일기다.
『75년5월26일(월) 날씨 맑음.
6시반 기상과 함께 운동장에 집합하여 준비체조와 4백m「러닝」으로 몸을 풀다. 이어「크로스·컨트리」(1km) 1회 왕복.
4백m 1회, 50m 3회, 30m 3회, 1백m 2회를 최대「스피드」로. 「허들·점프」3회와 팔굽혀펴기 30분. 연수관에서 줄타기 3회와 경기체조로 상오훈련 완료. 체중은 아침훈련전의 68.2㎏이 1.2㎏이나 준 67㎏.
하오훈련은 3시반부터 훈련장에서 시작. 「그라운드」자세에서 옆굴리기 반복 연습1시간. 「스파링」에 들어가 이경철과 3회, 장호성과 3회.
「태클」반복연습 1시간 뒤 연수관에서 「바벨」로 체력단련. 체중은 65.5㎏으로 새벽 기상 때보다 2.7㎏이 감소.
야간훈련은 8시 시작. 이경철과「스파링」3회. 「태클」과「브리지」등 공·수 연습 뒤 9시반에 훈련완료.』
이같은 강훈을 1년 이상 받은 끝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것은 내자신의 인내로 딴 것이지만 이를 뒷받침한 전국민의 영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레슬링」에서는 숙원의 금「메달」이 나왔다. 끝으로 온 국민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나쁘면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레슬링」이외에도 유도·「아마·복싱」등 비인기 종목의 경기장도 찾아 제2의 금「메달」이 나오도록 성원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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