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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고도「아스파한」의 장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뜻밖에도「라프산잔」에서는 D전선의 직원들까지 만나게 되니 우리나라의 일부를 옮겨온 듯이 느껴졌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모두들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 내가 연장자여서 맏형 뻘이 되는데다가 조국에서 온 개인사절(?)로서도 그냥 헤어질 수 없었다.
그 전날에 마련해 두었던 선물인 양말을 한 켤레씩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특히 운전기사들에게는『이 양말은 약소하지만 여러분이「브레이크」를 더 조심있게 밟으시라는 뜻으로 드리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하는 격려의 말을 했다.
서로들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앞으로의 축하를 빌었다.
우리의 운수기지「반다라바스」항구를 떠난지 사흘 째 되던 날은 길에서 우리 운전기사가 모는 대형「트럭」을 무려 50대 가량이나 만났다. 지형이 다를 뿐 우리 동포들을 많이 만나니 고국에 온 기분이었다.
오후에는「야즈드」란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동서교통의 요지로서「실크로드」이기도 하다. 그 옛날 중국의 견직물이 이 길을 통하여「유럽」으로 팔렸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지만 더욱이 역사적인 환상을 자아내는 것은「마르코·폴로」가 어쩌면 이 길을 다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야즈드」에서「나인」이란 곳을 거쳐 어두워 졌을 때 나의 목적지인 고도「이스파한」에 가까운 언덕에 이르렀다.
길가에서 저녁을 지을 때 바람이 몹시 불어 모래가 많이 섞여서 여러 운전기사들과 함께 저녁을 드는데 자금자금하여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한 때문인지 우리 운전기사들은 모래 밥이 아랑곳없었다.
밤에 길가에서 밥을 지어먹고는 다시 떠나 얼마 뒤「이스파한」에 이르렀다. 고도의 밤 풍경이 유독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이스파한」은 이 나라 3대 도시의 하나다. 2천년의 역사를 지닌「페르샤」의 옛 도시로서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는 지금의 인구보다 3배나 되었을 뿐 아니라 찬란한「페르샤」문화가 꽃피고 있어「세계의 절반」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던 도시인만큼 지금도 여전히 그런 여운이 감돈다.
10여년 전에 봤을 때엔 봄이어서「이스파한」의 명물인 장미꽃이 피고「나이팅게일」이 연가를 부르는 매우「로맨틱」한 분위기였는데 계절 탓인지 꽃도 피지 않고「나이팅게일」의 울음도 들을 수가 없었으나 고색 창연한 수많은「이슬람」사원의 짙푸른「타일」로 씌운「돔」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스파한」의 사원들은 옛「페르샤」의 전통적인 건축미를 지니며 어떤 나라의「이슬람」사원보다도 아름답다.
그전에 사귄 한 유지를 찾으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고 놀라며 그의 부인도 반겼다. 이 부부는「인텔리겐차」로서 이젠 중년이 되어 있었다
이 부인은 장미에 대한 연구가이기도 하여 이에 대한 문헌이며 예술작품이며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장미꽃은 영국의 국화라고 하지만 실은 자기 나라「이스파한」이 본고장이라고 자랑하며, 저 유명한「프랑스」작곡가「모레」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가곡『「이스파한」의 장미』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장미는「이스파한」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 부인은「그리스」시인「사포」의『장미의 찬가』를 낭송하고 시인「릴케」가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이야기며 독일시인「한스·카로사」가「베를린」이 설령 초토가 되더라도 거기다 한 그루 장미나무를 심겠다고 노래한 이야기며, 「네루」가 자기의 죽은 아내를 추도하기 위하여 날마다 달고 다녔다는 빨간 장미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렇듯 아름다운 장미의「에피소드」들이 한결같이 자기 나라에 그 본향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 부인은 장미처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장미에 대하여 그렇듯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에 부인이야말로 장미의 요정이며「장미부인」이라고 찬양했다. 그랬더니 이렇듯 찬란한 칭찬을 받는 것은 처음이니 오래 간직해두었던, 장미주를 저녁식사에는 대접하겠노라고 하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국제적인 참다운 사랑이 이처럼 강렬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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