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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시절 서명을 받아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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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복
이상복 기자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

갈팡질팡 행보를 보이던 테리 매컬리프 버지니아 주지사가 지난달 말 동해 병기(倂記)법안에 서명해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났다. 이로써 미국 최초로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함께 쓰도록 하는 법안이 7월 발효된다. 끝까지 마음 졸였던 지역 한인들도 이젠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됐다.

 법안이 확정되면서 각계에서 성원이 이어지고 있다. 이 운동을 후원했던 중앙일보 워싱턴지사에도 한국에서부터 각종 축하와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일본이 교과서 도발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멀리서나마 한인들의 쾌거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한인사회 자체적으로도 지난 노력을 평가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일회성 사건으로 넘기기엔 너무나 많은 경험이 축적돼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여러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대다수 한인들이 주지사의 문건을 최고의 성공 요인으로 꼽고 있는 부분이었다. 지난 3일 한인단체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피터 김 ‘미주 한인의 목소리’ 회장은 “이 문건이 없었다면 동해 병기 법안은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선거든 한 표가 아쉽게 마련이지만 지난해 말 매컬리프 주지사 후보는 더 그랬다. 워낙 박빙의 승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인 밀집 지역의 한식당까지 찾아와 당선되면 동해 법안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좀 더 확실한 보장을 원하는 한인들에게 후보 측은 매컬리프의 친필 서명이 적힌 문서를 건넸다.

 잊혀졌던 이 문서가 화려하게 부활한 건 지난 2월 동해 법안이 주의회에서 폐기될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일본 대사관이 대대적 로비에 나서고 주지사까지 방해 공작을 벌였을 때 A4용지 한 장에 불과한 이 종이가 판도를 바꿔놓았다. 이 문서가 미국 주류 언론에 보도되자 주지사는 방해 작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야당인 공화당은 주지사의 신의를 문제 삼아 당 차원에서 한인들을 밀겠다고 결의했다.

 어느 나라나 선거운동 기간엔 느슨한 약속과 공약이 판치는 게 보통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소수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려면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비롯해 미국에서도 선거의 계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를 방관자처럼 지켜보는 건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내는 셈이다. 일단 당선된 후에는 정책 하나를 바꾸기가 너무 힘이 든다. 따라서 그 이전에 지역별로 한인들의 공통된 요구사항을 정리해 후보들의 서명을 받는 작업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공 사례가 많이 나올수록 한인들의 정치적 파워가 커지고, 이는 대한민국의 영향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의 로비를 이겨낸 동해 병기 운동은 그 차원에서 소중한 경험적 모델이 될 수 있다.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