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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엔 이기고 승부에 졌다"-중견기사들이 본 한일정상 특별기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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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봉수 왕위의 도일대국은 비록 승부로는 2패의 결과로 나타났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한국바둑도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한일바둑교류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뜻 있는 행사였다. 서왕위를 비롯한 중견기사들로부터 이번 행사의 의의와 내용, 그리고 한국바둑의 전망 등을 들어본다. <편집자주>

<참석자>
서봉수 (왕립·4단)
윤기현 (기사회장·7단)
하찬석 (국수·6단)
김수영 (관전기담당·5단)
윤=한일기사들이 대국한 일은 전에도 몇번 있었으나 이번 대국은 참여한 기사들이 모두 양국바둑을 대표하는 20대 초반의 정예기사들이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지요.
김=그보다 더 큰 의의는 서왕위가 도일수업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타이틀」보유자라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윤7단·하6단도 그렇지만 조남철8단을 비롯한 국내정상급 기사들이 모두 도일수업을 거쳤으니까요.
하=말하자면 순수한 한국바둑이 과연 어느 정도냐를 측정하는 계기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윤=하지만 서왕위가 두번을 다 졌대서가 아니라 승부 그 자체만 가지고 양국바둑의 수준을 가름할 수는 없다고 봐요. 조치?7단과의 대국 때나 「고바야시」7단과의 대국 때나 서왕위가 계속 우세한 바둑이었지 앉습니까.
서=정신력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령 국면이 우세하다고 판단되면 방심하게 돼서 계속 안일한 수가 튀어나오는데 조7단이나 「고바야시」7단이나 우세할수록 더욱 틈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천=승부에 대한 집념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긴데 그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 기사들이 대게 취미로 바둑을 두다가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반면 일본기사들은 어렸을 적부터 피나는 수련을 통해 「프로」의 기질을 체득하지 않습니까.
김=그래서 우리는『바둑에 이기고 승부에 졌다』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일본에서는 승부 그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번 두 차례의 대국도 『바둑에 이기고 승부에 졌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윤=그런데 이번 대국은 분위기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생소했을 것 같은데 어땠읍니까.
서=아닌게 아니라 대국실 분위기가 생소해서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우선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기록자의 초읽기조차 알아듣지 못했어요.
하=분위기가 맞지 않으면 제 실력이 발휘되지 않게 마련이지요. 이런 것도 극복할 수 있어야 정말 뛰어난 기사가 되겠읍니다만….
김=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생활여건부터 다르니까 심리적으로도 부담을 갖게 되겠지요.
서=좋은 환경 속에서 진지한 자세로 바둑에만 전념함수 있는 일본기사들을 보고 참 부러웠어요.
윤=일본에서 기사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기원엘 가보자』고 하면 난처해집니다. 기사 연구실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우리 기원엘 안내해 봤자 치부만 드러내는 것 아니겠어요.
하=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 기사들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갖추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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