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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의 나라' 일, 안 의사 범죄자라 할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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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러스트=강일구]

일본 우파가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로 깎아내릴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 1960년 10월 연단에 뛰어올라 열변을 토하던 일본사회당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 위원장을 난자해 살해한, 앳된 얼굴의 우익 청년이다. 이때 그의 품에는 “일본의 적화를 꿈꾸는 사회주의자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적힌 쪽지가 있었다. 당시 17세. 살해 장면은 TV로 생중계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야마구치는 곧바로 수감됐지만 21일 뒤 목매 자살한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극우파들이 그를 열사로 떠받들며 때만 되면 그의 망령을 불러내는 까닭이다. 이들은 야마구치의 기일엔 매년 묘소로 몰려가 추모제를 지낸다. 2010년 50주기 땐 아예 사건이 일어났던 히비야 공회당에서 성대한 추도식을 열었다.

 이런 야마구치와 안 의사를 견줘보자. 먼저 안 의사. 조국의 강탈을 막기 위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었는가. 참정권도 없는 상황에서 언론·사회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야욕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요인 저격이란 극단적 방법으로 조선의 비극을 알리는 게 유일했을 터다.

 반면 아사누마가 살해됐을 때 일본사회당은 집권세력도 아니었다. 선거·기고 등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정상적 방법도 보장돼 있었다. 그런데도 야마구치는 칼을 들었다.

 ‘저항권’이라는 게 있다. 기본적 인권이 국가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짓밟히는데도 이를 민주적 방법으로 막을 수 없다면 혁명·민중봉기 등 모든 수단이 용인된다는 논리다. 저항권은 국가 간에도 적용된다. 나라를 빼앗기게 된 약소국 국민이 주권 회복을 위해 무력투쟁한다면 이 역시 정당화된다.

 대표적 사례가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런던으로 옮겨간 체코 망명정부는 나치의 핵심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보헤미아 총독을 암살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체코 출신 레지스탕스들을 프라하로 침투시킨다. 이들은 출근길의 하이드리히를 저격해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작전을 끝낸 대원들은 프라하의 교회에 숨는다. 그러나 곧 나치에 발각돼 격렬한 전투 끝에 모두 자살하고 만다. 전사에 길이 남은 이 사건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닮은꼴은 여기까지다. 이후 완전히 다른 양상이 전개됐다. 종전이 되자 대원들이 숨진 성 카를 보르메우스 교회는 성지가 된다. 95년엔 이들을 기리는 국립기념관까지 들어선다. 눈길을 끄는 건 독일 정부가 항의하기는커녕 기념관 건립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도 많은 독일인이 찾아와 옛 교훈을 되새긴다. 반면 한·중이 안중근 기념관을 짓겠다 하자 일본 관방장관은 “테러리스트 기념관”이라며 불쾌감을 표출했다.

 일본만큼 정치 테러가 잦은 나라도 드물다.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근대화의 기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부터 암살당했다.

 막부시대는 물론이고 20세기 이후에도 하라 다카시(原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현직 총리 2명을 비롯해 근 20명의 정치인·기업가·언론인 등이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놀라운 건 거물 정치인을 암살하고도 5년, 8년 만에 석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단 사실이다. 사무라이 전통 탓인지 일본 사회는 정치적 테러에 관대하단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도 일본 극우파들은 안 의사는 범죄자, 야마구치는 열사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런 극우파들과 상당 부분 정서를 공유하는 아베 정권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 과거사를 직시하지 않는 아베 정권의 팔을 비틀어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억지 춘향식 발언을 끌어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중재 아래 한·미·일 정상회담을 해본들 앙금이 가실 리 만무하다.

 현재 아베 정권은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켜 경제적 어려움을 자초하고 있다. 외교 관계가 나빠져도 경제는 괜찮다는 ‘아시안 패러독스’는 깨진 지 오래다. 지난해 일본의 수출은 10.2% 줄어 2년 연속 감소했다. 최대 요인은 대중 수출 축소로 이 역시 10.2% 격감했다. 아베 정권에 분개한 중국인들이 일제를 보이콧한 결과다. 이웃 나라와 척지면 감정만 상하는 게 아니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걸 일본인들은 절감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대외관계를 개선하라는 여론이 쏟아져 아베의 태도가 바뀌든, 아니면 정권이 교체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베 정권과는 아예 상종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청와대·외교부에 적지 않은 듯하다.

  하나 이런 소극적 처신보단 적극 대응하는 게 어떨까. 냉소적 무시는 한·일 간 난제를 풀어낼 근본적 처방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나서자 크게 분개한다. 그러나 반대하는 대신 아예 양심적 인사로 이뤄진 한·중·일 공동조사단 같은 걸 만들어 철저히 검증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전문가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 자료가 충분히 축적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 차제에 샅샅이 조사해 앞으로 군소리 못하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남정호 국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