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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色界) : 대한민국 성장의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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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색(色), 네 개의 욕망.’ 얼마 전 방영된 KBS 기획물이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하는 빨강·초록·파랑과 그 합인 하양을 문명사 측면에서 파고든 교양물이다. 제작팀은 색의 의미를 강조한다. ‘인간은 구원(파랑)을 향한 욕망을 거쳐 불멸을 염원하는 빨강, 소유하고자 하는 초록을 지나 탐미(하양)로 돌아간다.’

 요즘 ‘성장의 한계’ 얘기를 많이 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업의 영업이익률은 꺾인다. 반도체·스마트폰·자동차 다음을 이끌 기둥산업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고속성장을 더 해야 하는데 동력이 없다고 한다. 또 누구는 성장 지상주의의 수명이 다했다고 진단한다. 모두 한계를 가리키지만 방향은 제각각이다. 지금 세대가 성장의 한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미래세대의 모습은 바뀐다. KAIST 미래전략연구센터(원장 이광형)와 재미있는 조사를 해봤다. 오피니언 리더 55명에게 ‘성장의 한계는 무엇이고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보느냐’를 물었다. 그 유형을 네 가지 색으로 나눠봤다.

 1 유형 빨강(불멸). ‘성장동력 상실이 주원인이며, 그 책임은 정부·지도층에 있다.’ 55명 중 16명.

 “결국 성장은 얼마나 불필요한 활동을 적게 하느냐에 달렸다. 성장의 한계는 낭비를 조장하는 제도와 이를 이용하는 정치권력 때문이다.”(벤처사업가) “규제가 많아서 되는 일이 없다. 공직자의 업무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다.”(재미 정치인) “수준 낮은 좌파 리더십이 문제다. 리더십을 바로잡자.”(중견그룹 CEO) “박정희 정부 이래로 이어온 산업화세대의 기득권이 문제다. 관 주도의 성장모델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기 어렵다.”(파워블로거)

 2 유형 초록(소유). ‘성장동력 상실이 한계의 주원인이지만 그 책임은 사회 전체에 있다.’ 13명.

 “저출산·고령화가 가장 큰 문제다. 성장에 불리한 인구구조가 만들어졌다. 모두가 각성해야 한다. 해결할 수 있을까.”(중견 언론인) “새로운 첨단산업을 못 만들어내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뇌과학자) “남북 분단이 경제 왜곡의 주범이다. 남북이 손잡고 통일로 가야 한다.”(과학연구기관 간부)

 3 유형 파랑(구원). ‘성장 지상주의가 한계의 주원인이며, 그 책임은 정부·지도층에 있다.’ 20명.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대기업과 정부가 이를 소홀히 했다.”(경제시민단체 간부) “주원인은 재벌 경제체제에 있다. 이런 체제에서는 다원성과 다양성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정치학 교수) “성장 중심의 국가정책 아래에서 불평등이 커진 게 가장 큰 원인이다.”(사회학 교수) “다수의 경제구성원이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다. 재분배 정책을 꾸준히 펴야 한다.”(증권분석가)

 마지막 유형 하양(탐미). ‘성장 지상주의가 한계의 주원인이지만 그 책임은 사회(지구) 전체에 있다.’ 6명.

 “성장의 한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과학연구기관 연구위원) “석유문명의 한계다.”(역사연구가) “우리의 모습은 몸집만 커진 아이다. 발전의 과정을 더 거쳐야 한다.”(행정연구기관 연구위원) “자원과 환경의 위기에서 비롯됐다. 지구적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한다.”(환경연구소 간부)

 결과적으로 파랑이 가장 많고 하양이 가장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성장동력 상실파가 성장 지상주의파보다 약간 많았다. 조진삼 KAIST 미래전략연구센터 연구원은 “정부·지도층 책임론이 사회 공동책임론을 압도한 점은 새겨볼 만한 대목”이라고 했다.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유권자와 출마자는 어떤 색깔을 고를까. 불멸의 소유일까, 탐미의 구원일까.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