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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이 전하는 학살의 현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리더즈·다이제스트」 잡지의 편집자 「앤더니·몰」은 75년 4월 17일 「프놈펜」이 공산군에 함락되기 직전 「캄보디아」를 탈출한 후 태국에서 「캄보디아」 피난민들을 맞아 광범한 자료수집을 했다.
동료기자인 「존·배런」과 함께 이 자료를 토대로 적화「캄보디아」의 실상을 파헤치는 책을 써서 금년 가을에 출간할 예정이다. 다음은 이 책의 한 부분을 「타임」지에서 전재한 것이다. <편집자 주>
「프놈펜」 동북부의 「몽콜보레이」에서 있었던 일. 「프롬」이란 이름을 가진 40세의 「크메르·루지」 지방사령관은 전후초기의 가장 야만적인 학살을 명령했다.
그는 4월 27일 젊은 공산군으로 구성된 부대에 대해 일단의 구정권 민간관리들을 『부정부패』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도록 지시했다. 30세 가량 된 「탄」이라는 장교는 이 지시에 따라 15명의 부하를 동원, 그 지방에 있는 10여명의 구 관리와 부인 및 아이들(모두 합쳐 60명)을 모아 놓고 뒤로 손을 묶은 뒤 하오 5시쯤 「트럭」에 실어 3km쯤 떨어진 「반테이네앙」의 「바나나」농원으로 끌고 갔다.
포로들은 「바나나」 숲 속의 공터로 끌려갔으며 겁에 질린 아낙네들과 어린애들은 가장주위에 모여 앉았다. 그들 주위에는 하루 이틀 전에 피살된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크메르·루지」군은 관리들을 한사람씩 끌어내 착검한 AK-47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 사이에 꿇어 앉혔다. 병사들은 거의 동시에 포로의 가슴과 등을 소총대검으로 찔러 쓰러뜨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포로에게 어떤 「크메르·루지」 병사는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크메르·루지」가 죽이는 것이야』하고 중얼거렸다.
공산군은 포로가족들을 차례 차례로 처치해나갔다. 남편이 죽어 넘어지면 공포에 질린 부인과 아이들은 시체주위에 몰려들었다. 다음은 부인들 차례였다. 부인들도 무릎을 꿇리고 대검에 찔려 죽었으며 마지막으로 어린이들까지 선 자리에서 칼을 맞았다.
60여명이 처형됐는데 겨우 6명만이 칼에 찔리지 않았다. 이들은 거의 갓난아기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이제 피에 미쳐버린 처형자 2명은 갓난아이의 팔다리를 찢어 죽였다.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 「바나나」밭은 대단히 시끄러웠다. 마을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는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는 포로들에게 달려왔으나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들 잽싸게 가버렸다.
마지막 어린아이가 처형되자 들판에는 무서운 정적이 깔리고 「크메르·루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는 풀밭에 물같이 흐르고 있더라』고 「크메르·루지」 「트럭」운전에 징발됐던 「이트·나임」(35)은 후에 술회했다.
10대의 군인들이 「뭉콜보레이」로 가기 위해 「트럭」에 올라타면서 정적은 깨졌다. 한 「크메르·루지」가 『저 늙은이는 칼로 두어 번만 찔러도 충분할 것 같았는데 우리는 몇 번이고 더 찔렀지. 늙은이는 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하고 말하자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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