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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제50화 외국유학시절(속)(6)박정진의 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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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동경여고사에 입학하여 일년쯤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에 부닥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박정진씨의 음독자살사건이었다.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경유학생 전체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분은 김순영씨와 같은 학년이어서 내가 입학하였을 때는 이미 동경여고사를 졸업한 후였다. 이때 이분은 동경여고사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셨고 이숙진씨와 합께 동경(제국) 대학에서 과목청강을 받고 있던 때다. 이때의 일본동경대학은 여자를 받은 전례가 없었고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었지만 이 두 분이 입학함으로써 여성을 위한 파격적 새 법을 만들어준 셈이라 하겠다.
아뭏든 박정진씨는 나의 경성여고보의 선배이기도 하여서나는 이분을 많이 따랐고 또 이분도 나를 아주 귀여워해 주셨다. 이런 분이 자살을 하였으니 일찌기 집에서 세상 떠난 분을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나는 몹시 두려웠었다. 이전에 박정진씨는 어디에 갈 적이면 나를 잘 데리고 다녔는데 두어 서너 번 웬 남자를 만나러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분을『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며 눈치도 없이 두 분을 따라다녔었다.
나는 그분이「아저씨」인 줄만 알았는데 박정진씨가 결국 그분 때문에 수면제를 먹고 음독자살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진씨는 이숙종 선생께 유서를 남겼는데 부디 학업에 열중하여 훌륭한 여성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말과 함께 뜻을 못 펴고 가는 자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래서 이숙종 선생은 주상 (주상) 노릇을 했으며 시체를 염하고 수의를 입히는 일까지 손수 하셨고 전 동경의 한국 유학생은 대부분 장례식에 참가시켰다. 방년의 처녀로서 얼마나 담대하고 놀라운 솜씨로 뒤처리를 하는지 내 눈에는 큰 어른으로만 비쳤었다.
후에 이숙종 선생의 자당께서 박정진씨의 자살 사건을 전해듣고 보내오신 편지에는 『부모님의 사람을 져 버리고 몹쓸 짓을 한 철부지』를 크게 꾸중하시는 내용이라 그 몹쓸 짓에 대한 꾸중까지도 모두 이숙종 선생께서 감내하신 셈이었다. 이렇게 야단이 나는 동안 우리는 예의 그 「아저씨」에게 연락을 하였건만 그는 장례식에조차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 계신 박팔양 오빠 한 분이 비통하게 장례식 전날 오셔서 알면 마음도 놓이게 했지만 여러 친구들의 슬픔을 더해 주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 내가 느낀것은 그 하기 어려운 공부를 이국땅에 와서 4년씩이나 마치고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는 여성선구자로서 장례식에조차 얼굴을 내밀지 않는 어느 한 남성을 위하여 귀한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내 나이로서는 사랑의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달콤한 이야기 거리여야 하였으나 박정진씨의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는 만약 내가 그분이었다면 결코 그런 일을 아니하였으리라는 생각과 아울러 이는 부모 형제께도 괴로움을 드리는 일일뿐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서도 쿤 손실이며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상당히 비판적인 냉정한 생각을 가졌었다. 따라서 나의 수학 자세를 한층 가다듬게 되었다.
나의 어머님은 순하고 착하시기만 해서 나를 귀여워만 하셨지만 아버님은 나를 어여삐 여기 시면서도 다른 한편 엄하신 분이어서 그분의 가르침의 구속력은 멀리 동경에까지 미쳤다.
보통학교 때도 짓궂은 남학생들이 이름을 부르며 집에까지 따라왔으나 한번도 되돌아보지도 못하고 소리도 한번 못 지르던 것이 여학교 시절에도 마찬 가지였고 동경시절에도 비슷하였다.
여학교 시절에는 주교동에서 재동학교까지 걸어다녔는데 남학생들이 뒤로 다가와서는 땋아 내린 머리꼬리를 채었지만 너무 아마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아무 항의도 못하는 주제였으니 나이 좀 더 들었다고 하여 그 주변이 더 나아질리 도 없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숙종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여서 이런 사건도 잘 처리하신 듯 하다. 이분이 그 형님되는 분과 함께 숙명여고보를 다니실 때 창경원 옆의 술렛골 이라는 긴 골목길을 거쳐가셔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분이 가는 길에서 남학생들이 하두 짓궂게 구니까 어느 날 하루 이 선생께서는 홱 돌아서시더니 남학생의 모자를 벗겨 빼앗아 가지고는 학교에까지 가져갔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남학생이 애걸복걸을 하고 형님은 조바심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분은 태연히 그 모자를 들고 가서는 학교선생님께 드리더라는 것이다.
몹시 행동반경이 좁고 비사교적이었던 나는 동경유학생들이 모이는 여러 회에도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로 남성들과는 교분이 없었다.
앞서 말한 박정진씨의 사건이라든가 또 나와 함께 입학하였던 다른 세 사람이 모두 2학년이나 3학년 때 연애나 결혼을 하여 학업을 중도에 그치는 것을 보니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다른 학교에 재학하던 한 친구가 애인의 하숙에 가서 이불깃도 바꾸어 주고 음식도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어쩐지 망칙스런 일인 것 같았다.
이렇게 되니까 남이 볼 적에 도도하고 차갑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특히 최근에들은 이야기인데 백두진씨가 나에게 대하여『조아무개는 그 때 굉장히 쌀쌀 맞았었다. 동경에서 하관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자기 짐을 받아 얹어주기까지 하였는데 그 긴 여행동안 고맙다는 말도 없고 본 척도 않더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당시의 나는 무척 비사교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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