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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고난은 삶의 가치를 창조하는 힘|쉽고 편히 살려는 데서 불신·부정이 싹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모두들 쉽게, 편하게, 넉넉하게 살아보자고 안간힘들을 쓴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가치관이며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돼버린 것 같다. 공부를 시키는 것도, 배우는 것도, 직장을 택하며 결혼상대를 구하는데까지도 그러하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땀흘리며 수고해서 살아야하는 현실은 저주스럽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잘 먹고 잘 쓰며 편안하게 쉽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협하고, 아부하고 절하고 양심도 팔아먹는다. 그렇다고 과연 고통과 고난은 저주스럽기만 한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약의 쓴맛과 같아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삶의 참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있기 전에 고통의 생활이 있고, 옥동자를 얻은 기쁨이 있기 전에 분만의 고통이 있듯이 아픔과 쓴맛은 바로 창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고난을 기어이 기피하는 것일까.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저마다 쉽게 편히 살자고 하다가 이 세상을 지옥과 같이 만들고 말았다.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부패·부정·불신·갈등·시기·싸움 등 그 수도 없는 죄악의 이름들이 쉽게 편히 잘 살아보자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이같이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자면 고난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곧게 살자면, 무애의 자유인이 되자면, 양심의 맑음을 지켜 살자면, 정의의 사도로 외치자면, 매사에 진실을 파헤치자면, 언제나 고난과 아픔이 문턱에 와 있게 마련이다.
자기 노력의 대가이상으로 쉽게 편히 살려는 생각은 인생을 좀먹게 하는 악령의 꾐이다.
오늘이 살기 쉽고 편하고 배부른 사람은 그 삶이 복된 줄을 모른다. 쉽고 편한 것은「사탄」의 것일 뿐 하나님의 저주인 것이다. 오히려 오늘 애통하고 굶주리며 의에 목마른 자들이 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고 복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사의 특징은 바로 수난의 민족이라는데 있다. 민족의 내일이 밝은 것도 오늘의 고통을 참고이길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국토의 허리가 끊기고, 민족이 찢겨진 이 아픔까지도 결국은 어느 민족도 깨우칠 수 없는 고난의 진리를 깨우쳐 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하지 않을까.
아픔·고난·십자가·죽음·실패로 끝난「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택한 인류구원의 방법이었다.
이는 아픔이 없이는 사랑도, 수난 없이는 정의도, 피 흘림이 없이는 자유도, 희생 없이는 봉사도 없다는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만능하신 하나님도 의와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하여는 이 같은 아픔을 택하셨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편히 쉽게 살자고 하면서 죽어가고 있다. 마치 꿀의 단맛에 묻혀 날개가 붙어버린 파리처럼 돼버렸다. 화장품을 사기 위해 몸을 버린 어리석은 여인같이 되고있다.
우리는 이제 얼어 죽어도 것 불을 쬐지 않던 양반의 정신이라도 되찾아야 한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하는 지조를 되살려야 하겠다.
곧게 자란 갈대를 보고도 비뚤어진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양심을 되찾아야 한다.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길도 결국 여기 있는 것이다. 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길도 또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고난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은 후 3일만에「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 같이 고난의 뒤끝은 결코 허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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