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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고려의 대몽 항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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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아시아」의 역사상 l2세기말에서 12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고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고려의 국내 정세는 다같이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먼저 대륙정세의 변화에 눈을 들러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만주 대륙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이 12세기초이래 대륙의 지배자로서 군림하여 왔으나 이 시기에 이르면 서서히 몰락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신하여 몽고족의 세력이 성장하였다. 만주대륙의 서북방에 자리잡고있던 당고족은 13세기초에 당목진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분열되어있던 몽고족의 세력을 통합하고 성길사한이 되면서 순식간에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인정권의 숙제>
한편 이시기에 고종의 국내정세도 크게 격변하고 있었다. 1170년(의종2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문신·귀족신분 층이 완전히 몰락하였다. 무인정권의 출현은 고려왕조의 기존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다시 말해서 고려사 자체의 시대구분의 기점이 되는 중대한 변혁이었다. 우리는 흔히 무인정권의 성립 이후부터를 고려후기라 부르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인정권자체의 정치적 안정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집권세력의 교체가 빈번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1196년(명종26년)에 섭장군 최충헌이 비상수단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최씨 정권이 개막된다. 그 뒤 최씨 정권은 4대에 걸쳐 약 60년 동안 고해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최씨 정권이 당면한 가장 큰 외교적 난제는 물론 몽고와의 관계였다. 최씨 정권은 국내에 남겨진 여러 난제들은 하나하나 해결하여 막강한 정치기반을 구축하였었지만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몽고와의 교섭에 있어서는 커다란 곤란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몽고는 최씨 정권에 있어서 벅찬 상대였다.

<몽고사신의 피살>
1219년(고종6년)계단족의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맺어진 고려와 몽고의 외교관계는 그 뒤 결코 순탄하지 못하였다. 고려로서는 몽고의 부당한 외교적인 압력에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파탄에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했다.
1225년에 고려에 왔던 몽고사신 저고여가 귀국 도중 살해당한 일이 생긴 것이다. 몽고는 고려에서 죽였다하여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6년 뒤인 1231년에 고려는 최초로 몽고군의 침략을 받게된다. 살례탑을 최고 지휘자로 한 몽고군은 압록강을 넘어와 남침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한 대몽관계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고려정부는 마지못해 불리한 조건으로 화평하였으나 몽고의 침략군이 철수한 뒤 곧 강화로 수도를 옮겼다. 1232년의 일이었다. 이때 최씨 정권의 집권자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였다. 최우는 강화천도의 반대의견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곧 천도를 결행하였던 것이다. 강화천도는 몽고의 무력침략에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구전 위한 입도>
이 사실을 안 몽고는 다시 고려를 침략해 왔다. 즉 이해 8월 살예탑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남침을 계속 했던 것이다. 12월에는 지금의 용인 근처인 처인성에까지 이르렀다. 몽고의 침략을 받게된 고려에서는 줄기차게 항전을 계속하였다. 가령 처인성에서 고려의 김윤후가 적의 사령관 살예탑을 활로 쏘아 죽인 것은 그러한 저항의식의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략 대군을 맞이하여 정면으로 결전할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요새를 거점으로 굳게 항전하거나 또는 유격전법으로 도처에서 적을 공격하여 타격을 가함으로써 전의를 상실하게 했던 것이다. 김윤후의 전과도 혁혁한 것이었지만 전년의 몽고 침략 때에 귀주성 전투에서 보여준 고려인의 굳센 감투정신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고려사』는 귀주성의 전투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해주고 있다.
귀주(귀성)는 고려서 북방의 군사적 요지였다. 몽고군이 침입하자 정주(의주)·삭주·위주(위원)등지의 장군·수령들이 이 귀주성에 집결했다.
고려군은 이성을 거점으로 정주분 도장군 김경손과 서북면 병마사 박서의 지휘아래 몽고의 맹렬한 공격을 분쇄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사』에서 옮겨놓아 보기로 한다.

<인력 아니라고 감탄>
몽병은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밤낮으로 성문을 공격하니 아군은 돌출하여 그들을 격주시켰다. 몽병은 차에 초목을 싣고 몸을 감추어 와서 친다. 김경손은 포차로써 철액을 녹여 쏘아 그것을 불사르니 몽병은 물러간다. 몽병은 다시 누차와 목상을 만들어 우피로 싸고 그 가운데에 군사를 숨겨 성 밑으로 지도를 판다. 박서는 철액으로 누차를 불사르고 다시 마른 이엉에 불을 붙여 목상을 태우니 몽병은 놀라 흩어진다. 몽병이 또 큰 포차 15대로써 성남을 급히 친다.
박서는 성 위에 대를 쌓고 포차로 돌을 날려서 물리친다. 몽병이 섶에 기름을 적셔 두텁게 쌓아 불을 지르고 성을 친다. 박서는 물을 부어 끄례했으나 불길이 더욱 거세게 일어난다. 박서는 다시 진흙을 물에 타서 던져 불길을 잡았다.
그 무렵 김경손은 호상에 앉아 독전하고 있었다. 적이 포로 쏜 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 뒤에서 있는 병사를 맞혀 즉사하게 하였다. 좌우에서 김경손에게 호상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경손은 『불가하다. 내가 움직이면 인심이 동요하리라』하고 끝내 옮겨 앉지 않았다. 이처럼 몽병은 3순 동안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했으나 박서와 김경손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임기응변으로 끝까지 막아내었다. 이에 몽고군은 『이성은 작은 것으로써 큰 것에 당적함은 하늘의 도운 바요, 인력이 아니다』 하며 드디어 포위를 풀고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 한 늙은 몽고장군이 귀주성을 둘러보고 『내가 소년 때부터 종군하여 전하의 성지와 공전의 상황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일찍이 이와 같이 공격해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탄복했다고 한다.

<최대제국 괴롭혀>
당시 몽고는 천하무적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몽고는 정복을 통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몽고의 영토는 「아시아」와 「유럽」대륙의 대부분에 걸쳐 있었다. 고려는 이와 같은 세계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고 끈기 있게 항전하여 나갔던 것이다. 몽고는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침략해 왔다. 살예탑의 전사 이후에도 용고·아모간·야고·거나대 등이 이끄는 몽고대군이 숨돌릴 새 없이 침입하여 고려의 내륙지방을 유린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가 받은 피해는 말할 수없이 컸다. 가령 l254년에서 1259년에 걸친 차나대의 내침 때의 참상을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남녀 부로(부로) 20만6천8백명. 살육 당한 자는 셀 수 없었다. 몽고병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불살라졌다.』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항전의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고려의 항전은 고려에 말할 수 없이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게 됐지만 한편 몽고로서도 견디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몽고는 여러 차례 조건부강화를 제의해 왔다. 무력에 의해서는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로서도 더 이상 항전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오랜 전쟁으로 고려의 국력이 바닥난 까닭이다. 그리고 고려의 국내정세변동은 몽고와의 강화교섭의 길을 트게 했다. 1258년 최씨 정권이 유경·김인준·임연 등에 의해 타도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 고종의 태자 전(뒤의 원종)은 강화 교섭차 중국에 갔다. 그곳에서 마침 남송을 공략 중이던 몽고의 홀필렬(뒤의 원세조)을 만났다. 이때 홀필렬은 고려의 태자를 만나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고려는 만리밖에 있는 나라로서 옛날에 당태종이 친정했어도 항복시킬 수 없었다. 이제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홀필렬이『하늘의 뜻』이라고 했다는데서 당시 몽고가 고려와의 강화를 어느 정도 절실히 바라고 있었는가를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즉 1260년에 강화가 이루어졌다. 약 30년만에 평화를 회복한 것이다.

<꺾인 뒤도 자주적>
물론 강화 조건은 고종에 불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두 나라의 국력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려가 강화 뒤에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마땅히 주목 되어야 할 것이다. 몽고가 당시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과 강화하는 예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정복한 지역을 직접 몽고의 영토로 편입하여버리거나, 또는 한국을 세움으로써 다른 민족의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말살했던 것이다.
당시 정복의 발길이 닿은 지역에서 무력에 의해 직접 항복시키지 못하고 강화로써 전투를 끝내고 그 주권을 인정한 예는 고려 이외에 달리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고려가 몽고에 끝까지 항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고는 막강한 군사력으로써도 끝내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몽고는 고려를 평화적으로 회유하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그것에 저항하는 역사로 점철되어왔다. 우리는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몽고의 침략만큼 장기간에 걸쳐 우리 사회와 문화를 황폐하게 만든 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그처럼 잔인하고 처참한 몽고의 침략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몽고는 물론 고려와의 강화 뒤에도 고려가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집요하게 정치적·외교적 압력을 가해왔던 것이다.

<저항의 불씨만은>
이와 같은 압력은 고려인의 항몽의식을 고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1237년(고종24년)께부터 16년의 세월에 걸려 만든 판목 8만1천1백37장의 대장경판은 대몽 항쟁의식의 구체적인 예다. 이 밖에 1270년의 개경환도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나는「삼별초의 난」은 몽고에 대한 무력항쟁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그리고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었다고 해서 고려의 대몽항쟁이 결코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항쟁의 방법이나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무력항쟁대신 강대한 외압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항쟁이 꾸준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항쟁을 통하여 우리민족은 새로운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키며 발전시켜 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역경과 난관을 헤치며 극복해온 우리 조상의 피나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우리는 고종의 대몽항쟁에서도 그 구체적인 예를 보게 되는 것이다.
참석자
대표 집필 하현강
고병익(동양사·서울대교수) 변태섭(한국사·서울대교수) 하현강(한국사·이대교수)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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