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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유종호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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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사진 최효정 기자]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1914~46)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다섯 줄의 장거리 시행(詩行)이 전부다. 노란 해바라기와 태양과 푸른 보리밭은 반 고흐를 상기시킨다. 먼발치의 살구꽃과 마당가의 채송화를 좋아했던 내게 해바라기는 싱거운 키다리 호박꽃이었다. 호박꽃도 꽃일까? 이 시와 반 고흐를 알고 나서 해바라기가 꽃으로 다가왔다. 예술은 변화와 전복을 초래한다.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말은 그래서도 맞다. 서정시가 대체로 그렇지만 20세기 한국 시는 특히 애상적이다. 그 가운데서 이색적인 D장조의 절창(絶唱)이다.

 명동백작 이봉구(1916~83)에게 ‘속·도정(續·道程)’이 있다. 육이오 직전에 발표된 이 단편을 통해 해바라기 시편을 접하고 혹했다. 전쟁 후 15개월의 강요된 방학 동안 신산을 겪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되고 싶었다. 별을 그리는 부나비의 가소로운 꿈이었지만 꿈이 있던 세월이 행복이 아니었을까? 행복은 허락되지 않으며 잃어버린 행복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반 고흐처럼 함형수도 정신착란을 겪었다 한다. 해바라기 시편 외엔 쓸 만한 게 없다. 그 점 그는 단벌 시인이다. 하지만 그렇고 그런 백 편보다 한 편의 절창이 얼마나 눈부신가.

유종호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사진=최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