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느냐 지우느냐 … 흔적, 그것이 문제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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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길어요.’ 죽은 의뢰인의 생전 흔적이나 비밀을 없애주는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중혁의 장편 속 한 구절이다. 김씨는 비밀의 긴 그림자를 깊은 우물 속으로 던져서 감추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반숙’ 같은 말랑말랑한 장르 소설 스타일로 풀어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딜리터(Deleter)’.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까지 해봤다. 사후에 온라인에 남겨진 기록이나 흔적을 없애주는 ‘디지털 장례’나 ‘디지털 유산관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 터라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런 직업은 없었다. 작가에게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김중혁(43)의 신작 장편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문학과지성사)에는 의뢰인이 죽은 뒤 살아생전 남긴 발자취와 흔적을 지워주는 탐정, 딜리터 구동치가 등장한다. 구동치가 의뢰받은 삭제 목록은 각양각색이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아 있을 하드디스크나 온라인상의 각종 자료, 일기장이나 없애고 싶은 편지 등을 망라한다.

 딜리터란 아이디어는 그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소설가 김연수(44)와 술을 마시다 얻었다.

 “둘 중 누구든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이 바로 달려가서 죽은 쪽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물에 담가 버리자고 했어요. 하드에 있는 습작 등을 없애게요. 유작이나 미발표작으로 나오는 거 싫으니까.”

 삶의 모든 자취가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인생이 시행착오의 총합이라면 누구나 지우고 싶은 것은 있게 마련이다. 그건 되돌리고 싶지 않은 어리석은 순간일 수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설픈 순간일 수도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행이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비밀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다락방 같은 곳에서 과거의 흔적이나 자취를 담은 것들을 발견했죠. 그런데 요즘은 컴퓨터의 이상한 폴더에서 뭔가를 찾게 되잖아요. 그런 걸 발견할 때 등골이 서늘해지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지우지 못해요. 지울 수도 없고 지우지 않을 수도 없는 애매한 지점이 인간의 속성인 듯해요.”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욕구와 남은 무언가를 지우고 싶은 욕구. 소설은 인간의 이런 양가 감정을 다룬다. 의뢰인의 기록을 세상 속에서 지워나가는 구동치와 정반대로 훼손된 사진을 복원하며 추억을 되살려주는 정소윤이라는 인물을 그린 것은 그래서다.

 “인간의 딜레마에요. 100년도 안 되는 유한한 삶 속에서 기록이나 자식 등을 남기며 자신을 지속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하는 사실을 없애고 싶은 마음도 있는.”

 그런 마음을 구동치는 이렇게 진단한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라고.

 묻어 버리고 싶은 것, 비밀의 가치는 이 지점에서 결정된다. ‘비밀이 몹시 중요한 사람은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지키려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면 비밀의 등급을 낮추고 비밀을 포기한다’는 구동치의 말처럼.

 “비밀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잴 수 없어요. 하지만 사적이며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제나 다루는 소재는 사뭇 진지하지만, 사실 책은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 순식간에 읽혔다. 그는 조금 투덜댔지만 기분은 좋은 듯했다. 사실 페이지 터너는 그가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소설 속에 ‘빨리 읽을 수 있다는 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소설을 관통하는 뜨거운 심장이 느껴졌다’는 구절을 넣어둔 걸 보면.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중혁=1971년 경북 김천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에 중편 ‘펭귄뉴스’로 등단. 김유정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 수상. 소설집 『펭귄뉴스』 『1F/B1』. 장편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 『모든 게 노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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