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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11년 부산항만 건설 착수|당시 인구 2만8천여명|대륙침략정책 관문으로|상해의 「콜레라」만연으로 「파리 잡는날」도|부평동서 최대상거래‥‥상권은 일인독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10년 한일합방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그해 9월30일자로 조선총독부관제(관제)와 조선총독부 지방 관제를 제정 공포했다.
지방제도는 도밑에 부·군을 두고 부에 부윤, 군에는 군수를 임명했다.
따라서 부산도 종래의 이사청(1905년설치)을 없애고 부산부를 설치, 동래군에 속했던 지금의 대신동·부민동·부용동·보수동·부평동·신창동·대청동·남포동·아미동·사성동·초장동·남부민동등을 부산부로 편입 시켰다.
초대 부산부윤에는 약송일삼랑이란 일본인이 취임했는데 이때 인구는 겨우 2만8천여명.
동래군서면일대가 부산부에 편입된것은 1936년이었다.
1911년 일제는 대륙침략정책을 수행하기위해 군사·경제적 요충인 부산을 자기들 나름대로 행정구역과 외형을 뜯어고치기 시작, 우선 부산항만건설에 손을 댔다. 항내를 정비하고 2만t급 선박 2척과 7천t급 선박 2척이 동시에 정박할수있게 제2잔교(잔교)를 만들었으며 잔교위에는「레일」을 부설, 해상교통이 철도와 연결되도록 했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부산에 전차가 운행된것도 이즈음.
부산진∼동래간 전차는 부산궤도 주식회사가 1910년에 기공, 1915년10월31일 개통을 보았고 그후 부산우체국∼토성동, 광복동선, 그리고 부산역전∼부산진간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부산진∼동래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그동안 일본인 부호들의 별장지로 유명했던 동래온천장이 일반 대중에게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전차 운행권을 갖고있던 조선「개스」전기주식회사가 온천장에 공동탕·휴게실·여관등을 지어 온천장을 개발했는데 오늘날까지 탕원(탕원)으로 유명한「박간탕원」은 당시 일본인 대지주 박간방태랑이 자신의 별장 전용으로 굴착 했던것이라고 한다.
전차 등장에 이어 부산의 명물하나가 1935년에 새로 생겼다. 영도대교의 가설이다. 부산과 영도는 이때까지 도선을 이용, 왕래를 해왔는데 부세가 늘어나고 교통량이 많아지자 부산부는 일종의 궁민(궁민)구제사업으로 영도대교가설공사를 벌였다.
총길이 2백14m63㎝중 부산쪽 31m30㎝는 도개교로 설계, 1천t급 선박도 자유롭게 통과할수 있게 했는데 총공사비는 일화로 70만8천「엥」이 들었다고.
부산부시절에도 「파리잡는 날」「하수구청소일」등이 있었다.
1927년대 상해에서「콜레라」가 크게 번져 부산에는 하루 30여명의 환자가 발생하자 부산부윤은 매월 제2토요일을 「파리잡는 날」로 공포, 주민들은 파리소탕에 동원되기도 했다.
부산부당시의 동이름은 해방후 47년에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동광동이 본정, 충무동은 소화통, 부용동은 중도정, 봉래동은 항정등으로 불렀다.
현재의 부평동시장은 부산부시절(1910년) 개설된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인 공설시장이었다. 당시 부평동시장의 이용권은 주변70리까지 미쳤고 연간거래액이 3백만「엥」을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상거래장이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상권은 일본인들이 잡고 있었다. 부평동시장 일본상인중에는 고리대금을 하는 자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10일에 1할이자를 받는 악질도 있어 3개월이면 원금만큼 이자가 늘어 채무자를 울렸다.
일본인관리였던 석번정이란자는 「조선귀호여담」에서 『채무를 독촉하는데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채무자를 잡아 2∼3일 묶어두면 그친척들이 돈을 보내 갚아준다』고 기술, 고리대금업을 하는 일본인의 악랄한 빛독촉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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