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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감정 외면한 판결하고도 “법대로 했다” 당당한 법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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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08면

법원이 성폭력 피해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가해자에게 친절하게(?) 알려줬다면? 황당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사연은 이렇다.

비난받는 대한민국 사법정의

2012년 A씨(25·여)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김모(30)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휴대전화를 빼앗겼다. 이후 A씨는 김씨를 형사고소하고 형사배상명령(형사재판과 동시에 손해배상명령을 신청하는 제도)을 신청했다.

악몽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A씨는 김씨와 형사합의를 했다. 재판을 맡은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김씨의 절도혐의만 인정해 징역 8월을 선고했다. 형사합의에 따라 성폭행혐의는 공소기각하고 배상명령신청도 각하했다.

문제는 이후 불거졌다. 재판부가 당사자인 A씨와 김씨에게 보낸 형사배상명령 각하 결정 판결문에 A씨의 신상정보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보복범죄가 두려워진 A씨는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불안감 때문에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형사배상명령의 절차와 성폭력특례법 규정이 모순됐던 탓이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26조는 피해자가 법원에 형사배상을 신청했을 때 법원이 신청인의 성명과 주소 등을 명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24조에는 성폭력범죄 수사나 재판을 담당한 공무원은 피해자의 성명, 주소 등을 누설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설령 두 법 사이에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법원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광주지법 관계자에게 공식 입장을 들어봤다.

광주지법 측은 “입법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법원 관계자는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했을 뿐”이라며 “문제가 있다면 해결은 입법자의 영역”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A씨가 ‘순수하게 일반적인 성폭력 피해자’와 다르다”고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피해금액 공탁도 받기 싫다면서 인적 사항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A씨는 배상신청을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소극적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황제 노역’ 터진 뒤에도 판결 옹호 급급
일당 5억원의 ‘황제 노역’ 판결이 처음 불거졌을 때 대법원은 해당 판결을 옹호하기 바빴다. 대법원 관계자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왜 이런 판결이 나왔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조세범죄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포탈세액의 2~5배까지의 벌금을 반드시 함께 부과하도록 돼 있습니다.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가산세까지 더해 포탈세액을 모두 납부했고, 지분 100% 기업이어서 횡령범죄도 실질적으로 회사에 손해가 가지 않았다고 봤어요. 이를 감안해 신체형은 집행유예(징역 2년6월, 집유 4년)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특가법이 벌금형도 병과하도록 규정했단 말입니다. 검찰은 벌금까지는 너무 과하다면서 벌금형 선고유예를 구형했잖아요. 재판장도 고민을 했겠죠. 벌금형 선고유예는 너무 형이 가볍다고 생각해서 254억원의 벌금형을 선고했고, 환형유치(換刑留置·벌금을 내지 못하는 범죄자에게 노역으로 대신하게 하는 제도) 기간은 50일로 정한 거예요. 유치기간을 너무 늘리면 신체형에서 집유를 받은 피고인에게 벌금형 명목으로 신체형을 살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설명대로라면 법원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해당 판결에는 아무런 위법함이 없다. 하지만 법대로, 기계적으로 내린 판결이 반드시 사법정의를 구현하는 걸까. 절도범이 기소 후에 훔친 물건을 되돌려 놓으면 실질적인 피해가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인지, 환형유치 기간을 늘리는 게 벌금을 납부하게 하는 압박의 수단이기도 한 게 아닌지 물었지만 대법원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법원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대법원은 28일 전국수석부장판사회의를 열어 환형유치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개선안에 따르면 벌금이 1억원 미만인 경우 노역 일당은 10만원, 1억원을 넘으면 벌금액의 1000분의 1을 기준으로 하되 벌금액에 따라 노역유치 기간의 하한선을 두도록 했다. 100억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은 피고인은 최소 900일의 노역을 해야 한다.

대법원은 ‘황제 노역 판결에 위법함이 없다’던 입장을 철회한 걸까. 전문가들은 사법부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 할 뿐 ‘법전(法典) 속 정의’에 매몰된 태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사법부의 정의만 옳다고 믿는 독선과 오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법원의 정의와 국민 법 감정 사이의 괴리감이 큰 이유는 뭘까. 법학자들은 근대사법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 국민의 법에 대한 이해가 선진국에 비해 부족하다는 데 이견을 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간극을 줄여나가는 것 역시 법원의 몫이라고 말한다.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서보학 교수의 설명이다.

“법의 영역이란 게 그동안 전문가들의 전유물 내지 전속공간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법조인들이 대개 국민의 수준을 많이 무시합니다. 사법관료들에게 이런 시각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 국민을 내려다보거나 국민의 요구는 무조건 ‘떼법’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강하고요. 그러다 보니 국민의 종복(從僕) 입장에서, 국민을 섬기는 입장에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걸 잊는 게 아닐까요.”

법원 안팎에서는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한 사법권력 핵심부의 보수적 성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보수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고위법관은 “법원행정처 후배들을 만난 뒤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법원을 떠나보니 국민이 사법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피부에 와 닿더군요. 법원행정처 후배들과 대화하면서 대법원이 예전에 비해 더 완고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밖에서 문제라고 여기는 것들을 전달하고 대법원의 구상은 어떤지 들어봐서 접점을 찾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후배들을 만나보니 ‘법원은 퍼펙트(완벽)하다’는 인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외부에서 개혁의 압박이 들어오면 조금은 움직일 거예요. 하지만 자기 의지로는 절대 바뀌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의 삶 바탕 위에서 법 해석·적용해야
법원 판결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 사법부가 가장 많이 내놓는 답은 ‘입법자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입법자가 모순된 법을 만들었으니 입법자가 해결할 몫이지 법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 사법부에는 잘못이 없다는 책임 회피성 해명이다.

실제로 28일 열린 수석부장판사회의에서는 “벌금액에 따라 노역일수의 하한선을 두는 건 재판권 침해”라는 주장도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 안팎에선 ‘사법부가 삼권분립에 따른 독립을 넘어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오동석 교수는 “법원이 국민이 실제 살아가는 바탕 위에서 법을 해석·적용해야지 형식논리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도 “법원이 어렵고 복잡한 법리와 용어를 앞세우는 건 마치 중세시대 교회가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든 라틴어로만 미사를 집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법이 전문가의 영역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준의 국민도 이해할 수 있어야 사법정의에 따른 법 집행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양 대법원장은 논란이 불거진 뒤 한 번도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28일 수석부장판사회의를 주재한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이 “재판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임을 되새기면서 국민을 납득시킬 재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밝혔을 뿐이다.

과연 ‘양승태 사법부’가 법전 속 정의에서 벗어나 국민 삶 속에 맨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아직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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