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은사를 다시 기리는 제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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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교수께서 후학들을 위해 30여 년 간 선각자적인 고난의 길을 걸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보답이지요. 퇴임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공직생활에 쫓겨 못 하셨던 일을 마치실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여건 조성을 해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 이상국 교수(병리학)는 내년 2월말 현역을 떠나게 될 병리학계의 권위 이제구 교수(3l년 근속)의 『은퇴 기념 논문집』 준비에 동분서주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지난 11월말 10명의 서울대 원로 교수가 정년으로 퇴임하게 되는 것이 밝혀지자 제자와 퇴임 교수가 몸담고 있던 학계를 중심으로 논문집·기념「디스크」·강연회·저서증정 등 기념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각 분야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퇴임하는 교수들이 학계에 끼친 공로와 업적을 기린다는 면에서는 뜻을 같이 하고 있다.
31년 동안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가르친 김성태 교수를 위해서는 이성구 교수(작곡과)를 중심으로 기념 「디스크」출반과 장학금 모금 운동이 활발하다. 『진달래』 『이별의 노래』 『물망초』등 김 교수가 작곡한 한국 가곡 수십 편을 제자인 성악가들이 취입, 독집 「디스크」로 만들어 내년 은퇴 전까지 증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편 김 교수의 아호를 딴「요석 장학 기금」을 만들어 우수한 작곡 지망생에게 지급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박상현 교수(29년 근속)의 경우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계간으로 발행되던『철학 논구』 4권을 기념호로 준비하고 있다. 제자들의 논문과 함께 박 교수 자신의 미발표 논문이 게재될 예정이다. 실존철학 연구에 일가를 이룬 박 교수를 위해 이 방면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민간 약의 수집과 그 과학화에 평생을 보낸 서울대 약대 이선주 교수(25년 근속)를 위해서는 「생약학회」를 중심으로 기념 논문을 기획 중이다. 내년 2월중 논문집이 완성되면 강연회를 함께 마련, 책을 증정한다고.
처음으로 은퇴 교수를 맞게 되는 서울대 공대 섬유 공학과는 지난 5일 졸업 회별로 동창회 간부들이 모여 재학생들과 함께 퇴임하는 김문상 교수(16년 근속)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다.
31년간 서울대 의대 내과에 근속하면서 한국인의 결핵과 그 퇴치 연구에 몰두한 김경식 박사를 위해서는 내과 전문지 『함춘 내과』 6권 2호가 정년 기념호로 꾸며질 것이라고 한다. 모든 공식적인 기념 행사를 극력 회피하는 김 박사의 성격 때문에 학계에 남긴 공적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기념물이 될 것 같아 죄송스럽다는 것이 제자인 한용철 교수의 말이다.
현재 서울대 음대 학장인 성악가 이상춘 교수(29년 근속)는 내년 2월 있을 개인 「리사이틀」 준비 관계로 여념이 없다. 재직 중 마지막으로 갖는 「리사이틀」이기 때문에 성악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기념 행사를 준비중에 있다.
이밖에 지질학과 손치무 교수(31년 근속) 생물 교육과 최기철 교수, 농대 농공학과 박영관 교수(22년 근속) 등을 위해서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제까지의 연구 업적을 총 망라하는 강연회를 내년 2월 중 갖게 될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정년 퇴직 교수들을 위한 제자들의 움직임에 대해 지난 60년 정년으로 서울대를 은퇴한 국사학자 이병도 박사(학술원 회장)는 『앞으로 계속 후학이나 제자들이 본받아도 좋은 전통』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경우는 마지막 강의를 전 제자가 모여 성대히 청강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도에 지나친다든지 형식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기념 행사 자체보다도 기념 행사를 통해 퇴임하는 스승이나 선배의 인간됨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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