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서 녹는 '에코 나일론 그물' … 듀폰도 못한 일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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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박성욱 국립수산과학원 박사(왼쪽)와 강경돈 삼성정밀화학 수석연구원(오른쪽)이 부산시 기장군 국립수산과학원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생분해 그물과 어망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삼성정밀화학]

#2007년 초겨울 경상북도 영덕. 대게 잡이 그물을 손질하던 한 선장이 고함을 질렀다.

 “ 글쎄 안 한대두. 왜 자꾸 귀찮게 해!”

 “선장님, 그러니까 한 번 써보시라니까요.”

 순간 숨통이 턱 하고 막혔다. ‘그물 하나 바꾸게 하려고’ 이렇게 멱살잡이까지 당해야 하나 싶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옹고집쟁이들이었다. “나일론 어망을 계속 쓰면 바닷속에 가라앉아 썩지도 않고, 나중엔 대게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게 된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5년 동안 개발해 만든 ‘녹는 어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박성욱(56) 국립수산과학원 박사는 차를 돌려 경북 울진으로 향했다. 울진 어민들이라도 설득해 볼 참이었다.

 #“‘이렇게 좋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23일 울진 후포항. 대게 잡이 어선 대성호 선주인 윤성구씨는 바닷속에서 녹는 ‘생분해 그물’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박 박사가 7년 전 생분해 그물을 들고 왔을 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후대에 깨끗한 바다를 물려주자”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물을 바꾸는 건 ‘큰일’이었다. 대게가 얼마나 잡힐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물은 엉킴이 적어 대게를 잡아 배에서 선별하는 작업 속도를 두 배나 높였다. 생각보다 튼튼해 예전엔 두 번 쓰고 버릴 그물을 한두 차례는 더 썼다. 생분해성 어망이 입소문을 타면서 울진의 어민 대다수는 나일론 그물을 버렸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게 산지인 영덕과 울진의 바닷속을 바꿔놓은 이들이 있다. 박성욱 박사와 강경돈(42) 삼성정밀화학 수석연구원이다. 바닷속에서 녹아 없어지는 세계 최초의 그물(생분해성 어망)이 이 두 사람의 손에서 태어났다.

 제주의 푸른 바다를 보고 자란 박 박사는 1991년 3월 국립수산과학원에 들어갔다. 그가 맡은 일은 어업 자동화 사업. 새벽 2시에 일어나 배를 타고, 조사를 마친 뒤 다시 육지로 돌아오면 오후 7시. 멀미가 심해 한 번 배를 타면 며칠은 고생을 해야 했다. 생각보다 고된 일에 사표를 쓴 것만도 열 번은 족히 넘었다. 배 타기가 싫어 “태풍 안 오나” 내심 바란 적도 많았다.

그대로 두면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되는 원사(사진 위), 기계로 꼬아 어종에 맞는 그물 제작(사진 가운데), 뜨거운 증기를 쬐어 준 뒤 건조해 완성(사진 아래). [자료 : 삼성정밀화학]

 2002년 울며 겨자 먹기로 배를 타던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물’이었다. 우리나라 어부들이 쓰는 그물은 모두 나일론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조업을 하다 끊어지거나 해서 가라앉은 그물은 그대로 바다의 쓰레기가 됐다. 일반 그물의 10%, 통발의 20%가 매년 바다에 버려졌다. 연 5만t에 달하는 양이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대게였다. 버려진 그물망에 다리가 걸리면 옴쭉달싹 못해 죽어버리는데, 암게나 어린 게들의 피해가 심해 어부들의 조업에도 문제를 줄 정도였다.

 그는 바다에 버려져도 몇 년 뒤면 녹아 없어지는 그물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물을 짜는 ‘소재’가 중요했다. 거미줄처럼 박테리아·곰팡이에 의해 자연스럽게 썩어 물과 이산화탄소로 완전히 분해되는 소재가 있어야 했다. 그는 이래화학(현 에스엔폴)과 손을 잡았다. 이래화학은 석유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플라스틱에 첨가제를 더해 자연 분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소재기술을 갖고 있었다.

 한 고비는 넘겼지만 새 그물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드러운 나일론은 발이 잘 걸려 대게 잡이가 수월했다. 반면 생분해 소재는 나일론보다 3배는 딱딱해 대게가 잘 잡히는 그물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5년 만에 대게용 그물을 만드는 데 성공해 어민들을 찾았지만 문전박대가 일쑤였다.

 새로운 그물을 대량생산해줄 그물 짜는 업체(편망회사)도 필요했다. 우리나라 어부들이 쓰는 대부분의 그물은 중국산이었다. 몇 안 되는 편망회사 대표들을 만나 설명회를 했다. “바다를 지킬 수 있는 녹는 그물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그에게 한 회사 대표가 “당신, 돈벌이하려는 업자 아니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부산광역시 수영구의 삼보산업을 찾아갔다. 김재호(69) 사장이 박 박사의 설명에 의기투합했다.

 제일 먼저 그의 그물을 써준 곳은 울진이었다. 생분해 그물을 써본 어부들은 “뜻밖”이라며 반색했다. 나일론 그물보다는 덜 부드러웠지만 잘 엉키지 않는 특징 덕에 조업이 수월했다. 나일론보다 튼튼해 두 번 조업하고 버릴 그물을 서너 번 쓸 수 있었다. 2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바스러지면서 분해돼 바다 쓰레기 걱정도 줄었다. 정부에서 그물 구입비를 지원해주면서 울진의 어부들만 쓰던 것이 영덕까지 퍼졌다. 김 사장은 “이제는 대게 잡이 어민들의 95%가 생분해성 어망을 쓰고 있다”며 “울진이나 구룡포에선 달라고 하는 어민은 많은데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말했다.

 대게 잡이 그물에만 그칠 순 없었다. 물고기마다 종류에 맞는 그물을 만들고 싶었다. 그가 도전하기로 한 것은 참조기였다. 참조기는 그물에 머리가 걸려야만 잡을 수 있다. 그물에 걸리면 온몸으로 펄떡이기 때문에 그 힘을 견딜 만한 탄성이 필요했다. 기존 소재만으론 그 탄력을 견디는 것이 어려웠다.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야만 했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이래화학이 경영난을 겪기 시작하면서 연구는 주춤해졌다.

 2011년 매물로 나온 이래화학을 삼성정밀화학이 인수했다. 자연 분해되는 플라스틱 소재기술을 보유한 이 회사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박 박사는 강경돈 수석연구원을 만나 “새로운 소재를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박 박사는 소재 만드는 공정을 바꿔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쌀과 보리를 섞어서 밥을 지으면 쌀보리밥이 될 뿐이지만, 아예 조건을 달리해(중합) 처음부터 ‘쌀보리’란 새 품종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강 연구원은 무릎을 쳤다. 기존엔 한 가지 생분해성 수지(PBS)를 썼다. 강도는 좋았지만 유연성이 떨어졌다. 그는 강도는 약하지만 유연성이 좋은 또 다른 생분해성 수지(PBAT)와 ‘중합’해 보기로 했다.

 강 연구원은 연구 4년째인 올 초 원하던 소재 개발에 성공했다. 박 박사는 “미국 듀폰이 개발한 나일론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친환경 소재(PBSAT) 개발”이라고 말했다. 파트너인 박 박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자, 강 연구원은 “소재인 레진을 만드는 지식만 있었을 뿐, 어종마다 다른 그물의 특성이나 통발·그물과 같은 어구의 특성을 몰랐다”며 “박 박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고 말했다.

 삼성정밀화학과 국립수산과학원은 새로 개발한 ‘에코 나일론’과 이를 활용한 그물 기술을 해외로 수출하기로 했다.

부산=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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