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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탄생 그 이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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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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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존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건 빛입니다. 인간 의식 속에 빛은 우주의 근원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빛을 38만 년간 꽉 붙들어 놨던 존재가 있습니다. 우주 탄생의 찰나에 발생했던 에너지 혹은 물질입니다. 이 에너지는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품고 있었습니다. 찰나의 순간은 ‘ 10-33’ 초라고 합니다. 그때 에너지의 크기는 ‘ 1020’ 배로 부풀려졌다고 합니다. 이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른바 ‘우주 급팽창’ 이론의 가설이었습니다. 지난주 이 가설의 증거가 발견돼 세계 과학계가 흥분했습니다.

 사회과학도에 정치 영역을 취재해온 저로서는 몇 가지 사실을 교정받아야 했습니다. 우주는 진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공기가 없다뿐이지 우주배경복사라는 전자파가 균질하게 꽉 짜여서 흘러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138억 년간 ‘스스로 존재’해온 것처럼 보였던 우주배경복사 가운데서 우주의 ‘급작스러운 팽창’을 증명하는 중력파라는 걸 찾아냈습니다. 이 중력파의 패턴은 비균질적입니다. 중력파 연구를 통해 우주의 탄생 지점까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존재의 근원, 물질의 신비가 밝혀지는 걸까요. 빛의 현현과 속도마저 제어하고 그 안에 가둬버렸다는 빅뱅 후 38만 년의 시공간. 그걸 증명한 중력파의 패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단순함과 소박함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림 참조> 규칙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형태와 붉고 푸른 색깔이 기묘한 감동을 줍니다.  

 138억 년 전 우주의 탄생 시점, 빅뱅의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빅뱅의 출발점에 접근하는 일은 인류 과학의 궁극적 염원입니다. 저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토산업대 교수가 한국의 한승수 총리를 방문하는 모습을 5년 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학자이자 가톨릭 신자인 한 총리가 “우주 탄생 이전엔 무슨 일이 있었나”라고 묻자 마스카와 교수가 “허수를 동원한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실증된 게 없다”고 답하더군요. 한 총리가 한술 더 떠 “신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라고 되묻자 마스카와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신을 논증하기엔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말을 흐렸습니다. 한국 총리의 의문과 일본 노벨상 수상자의 신중한 답변이 있은 지 5년 뒤 우리는 이 문제에 가장 근접한 과학적 발견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발견을 접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우주는 시공간이 뒤틀려 있다고는 하지만 영원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는 점. 우주는 138억 년이란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엄연히 시작이 있다는 사실. 빛은 근원에서 잉태돼 38만 년간 숨죽이고 있다가 갑자기 내뿜어지기 시작했다는 것. 우주는 우리 은하계와 안드로메다 은하 같은 숱한 은하들을 포함한 무한 같은 시공간이지만 그렇다 해도 경계가 있다는 점.

 해서 궁금합니다. 우주의 시작 이전엔 무엇이 있을까. 우주의 경계선 바깥엔 어떤 존재가 있는 걸까. 만화 같은 이런 의문들은 더 이상 신비의 영역에만 내맡겨지지 않을 겁니다. “초기 우주에 대한 연구가 상상의 세계에서 입증 가능한 과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됐다. 앞으로 10년 정도면 급팽창이 일어난 과정도 밝혀낼 수 있을 것”(한국천문연구원 송용선 박사)이란 얘기가 나오니까요.

 상상력은 공상을 장려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기초 과학의 탄탄한 축적과 이를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나옵니다. 중력파 패턴 같은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규칙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말이죠. 21세기 국가와 기업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한국이 휴대전화로 먹고사는 시절이 언제까지 가겠습니까. 먹거리 패러다임의 새로운 돌파가 우주의 근원을 좇는 신비의 탐구 정신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창조경제니 미래 먹거리 같은 얘기들이 화두가 된 지 오래입니다. 눈을 더 깊고 근원적인 곳, 궁극적인 곳으로 돌리면 어떨까 합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