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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여왕이 던진 삶의 희망 “쉰쯤 되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7호 26면

저자: 애거서 크리스티 출판사: 황금가지 가격: 2만8000원

흑백사진 속 무표정한 얼굴이 종종 오해를 부르지만, 알고 보면 ‘추리소설의 여왕’은 무서운 여자가 아니다. 코난 도일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미스터리의 거성’인 만큼 애거사 크리스티에겐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있다. 20세기 초 여성의 사회활동이 미미하던 시절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라 지금까지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라는 그는 대체 얼마나 잘난 여자였을까.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가 60세 되던 해부터 15년에 걸쳐 써내려간 무려 800쪽짜리 자서전은 그에 관한 오해를 천천히 뒤집어준다. 생애 최초의 기억이라는 3세 생일부터 인생의 온갖 시시콜콜한 기억들이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바쁜 세상에 어지간한 팬심이 아니라면 이런 긴 호흡의 에세이에 집중할 수 있을까 싶지만, 한 여인의 사소한 일상의 향연 속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생철학이 보석처럼 빛난다. 고개를 넘고 넘어 정상에 오른 한 인간의 담담한 회고는 인생에 관한 통찰을 듬뿍 담고 있다.

그는 어떻게 ‘여왕’이 됐을까. 비상한 천재였을까? 최고가 되리란 야심으로 달려왔을까? 파란만장한 삶 자체가 영감을 줬을까?

오히려 그의 인생은 극히 평범했다. “나는 전혀 꿈도 없었다. 무엇도 잘하는 것이 없었다. 한 번도 작가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는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남자만 기다리던 그 시대의 전형적인 아가씨였다. 셜록 홈즈를 좋아하던 언니 덕분에 재미로 작품을 쓰게 됐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대박을 친 게 아니라 출판사의 퇴짜를 수년간 예사로 맞으며 조금씩 작가가 되어 갔다.

그나마 첫 결혼의 실패가 밋밋한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남편의 배신에도 1년간 이혼을 미룰 만큼 남편에 의존적이었던 그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남편’임을 깨닫고 다시는 타인의 손에 좌지우지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제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약한 사람인지 여부를 알아내야 한다.(중략) 나는 내게 개와 비슷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누군가 데려가 주지 않으면 개는 산책을 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평생 이와 같은 습성을 버리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만난 조카뻘 청년과 재혼 후 대표작들을 쏟아내며 작가로서도 날개를 달게 됐지만, 결코 글쓰기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고고학자인 남편과 세계를 돌며 발굴가로서의 삶도 소중히 했고, 두 번의 전쟁 중에는 간호사로, 또 약제사로 변신해 제 몫을 다했다. “기관사가 될 수 없다면 기차 정비공이 되라”를 좌우명으로 살았다는 그의 인생은 결코 ‘꿈을 이룬’ 인생은 아니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 뿐이다. 가던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갔고, 그 길도 걸을 만했던 거다.

70대가 되어 ‘죽음을 대기 중’이라면서도 “감정과 관계의 삶이 끝난 후 활짝 꽃피운 두 번째 인생을 대단히 즐기고 있다”고 긍정했다. “쉰 살쯤 되면 느닷없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귀띔은 인생엔 늘 희망이 있음을 기대하게 한다. 육체의 노화는 힘들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달변가들이 전수하는 값싼 처세술이나 영혼 없는 위로의 말보다 ‘말을 못해 글로 쓴다’는 노부인의 독백이 훨씬 또렷하게 들려오는 건 왜일까. ‘인생은 결국 기쁜 것’임을 몸소 겪어낸 그의 진심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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