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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일상적 삶 속에서도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해야 좋은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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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최근의 큰 뉴스의 하나는 주로 미국 대학들의 협동 연구 계획인 BICEP 2가 빅뱅의 증거를 발견했다는 보도다. 작은 입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순식간에 폭발 팽창하여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빅뱅의 이론이고, 이번의 발견은 그 흔적으로 우주의 마이크로파동의 배경에 공간적 뒤틀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국외자에게 알기 어려운 이론이지만 보도는 우주 창조의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게 한다.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3> 삶의 문제

몇 해 전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조지 스무트 교수가 이화여대에서 빅뱅 이론에 대한 강연을 하고 청중의 질문을 받았다. 한 학생의 질문은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답은 시간과 공간도 빅뱅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 제기조차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없다는 것은 있음을 전제로 하여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창조에 관한 이론들은 천체물리학의 관점에서 말하든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든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의 틀을 완전히 넘어간다. 신기한 것은 논리를 넘어가는 사실을 논리적 사고의 연산(演算)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빅뱅 이론과 같은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보통 사람에게도 140억 년 전의 우주의 시작은 물론, 그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의 관점에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경탄과 경외를 느끼게 한다. 이 느낌은 우주와 세계를 향하고 또 인간 존재를 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거대한 우주적 과정에서 한없이 하찮은 것인 듯하다. 그러면서 경이로운 것은 이 거대한 과정에 사람이 참여하고 또 나(自我)라는 한없이 작은 존재가 참여의 기여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어떤 천체물리학자들의 ‘우주의 인간 원리(cosmological anthropic principle)’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원리로 하여 우주를 관찰하고 의식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일정한 구도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물리학자들의 이론이다.

이론에 불과하면서도, 그로 인해 우리가 갖는 경이의 느낌이 전혀 현실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종교 또는 윤리적 가르침에서 두루 발견되는 외경심 또는 경(敬)의 태도는 이 느낌에 연결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외경심이 사람의 실천적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우주적 현상에 대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테두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적정한 크기의 테두리는 보다 큰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얼마 전 한 강연회에서 최장집 교수는 학문적 탐구의 의의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프랑스의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빌려서 학문 연구에 세 가지 층이 있다는 것을 바다의 비유로 말했다. 바다에는 끊임없이 변하는 파도가 있고, 그 아래로 그 나름으로 움직이는 해류가 있다. 또 그 아래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심해가 있다. 보다 중요한 연구는 파도보다는 해류에 관계된다는 지적이었다.

브로델의 ‘장기 지속(longue duree)’의 개념은 이제는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이것은 사건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것보다 긴 시간의 흐름과 넓은 영역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변화를 해명하고자 하는 역사 연구의 시각을 규정한다. 물론 보다 깊고 넓은 시각에서 인간 존재를 살피는 역사 연구, 가령 일정한 지역의 DNA의 지속과 흐름을 살피는 연구도 있다(어떤 생물학자들은 DNA를 통해 유럽의 오랜 인종적 변화의 유형을 추적하려 한 바 있다).

이런 학문 연구 범위의 시각차에 비슷한 것은 사람들의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나날의 사건을 주로 다루는 역사를 “사건적 역사”라고 부르고 이것은 연대기적 역사를 쓰는 사람이나 저널리스트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사회적인 삶의 측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삶도 나날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거기에도 조금 더 긴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교육자들은 그날 그날의 삶이 아니라 장기적 목표를 가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나 현 시점을 넘어선 전망이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사건적 관심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삶의 유지 자체가 사건적 주목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위기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멀리 내다보고 보다 넓게 생각하면서 사는 삶이 좋은 삶인 것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사람은 사건적 삶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지도자란 오늘의 문제를 넘어 멀고 넓게 보는 사람이다. 우주의 시종(始終)에까지 마음을 열어두려는 사람이 정신적 지도자다. 그러나 이 지도자는 천체물리학자와는 달리 그 먼 것에 이르는 비전으로 오늘의 사건적 삶을 밝히고자 한다. 정치 지도자는-또 정치적 비전은-우주의 시종은 아니라도 오늘의 사건을 넘어서는 구조적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늘의 사건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적 삶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현실이 그 행동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너무 벗어나면, 정치는 대중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독재자의 길을 가야 한다.

여기에서 이야기해보려는 것은 인생론이나 지도자론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회 문제에 대처해나가는 데도 좁고 넓은 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모순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보자는 것이다. 정치는 당면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넘어 보다 넓은 지평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면한 사건이 안겨주는 과제, 그리고 보다 큰 현실의 구조와 그것의 바른 변화-이런 것들의 모순은 여러 문제, 사회, 경제, 정치, 국제 관계, 통일의 문제 등에서 풀기 어려운 옹이가 된다.

환경 문제는 오늘의 사회 또는 인류가 부닥치는 가장 큰 범위에서의 문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을 찾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움의 한 가지는, 삶의 가장 큰 테두리인 환경에 일어나고 있는 재난의 예고가 사람들에게는 과히 크지 않은 사건들로서 체험될 뿐이라는 데 있다. 그리하여 문제의 급박함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큰 대책들이 작은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영역이 너무 크면 문제는 총괄적 답을 허용하지 않는 복합적 성격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3월 초에 세계적 언어학자이며 반체제비판주의자인 노엄 촘스키 교수가 언어학 강의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강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강연 내용을 아직은 인터넷으로 접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재팬 타임스 인터뷰에 간단하게 표명되었다. 한·중·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는 현 일본 정부의 입장에 비판적인 것은 예상하는 바대로였다. 중국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그것을 문제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중국의 이해관계의 방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의 다른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또는 그 전부터의 미국의 패권주의에 그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미국의 압력으로 제정된 일본의 평화헌법은 자랑할 만한 모범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촘스키 교수의 정치 논의가 늘 그러하듯이, 관념의 관점에서는 공평성과 이상을 표현한 것이지만 반드시 정치의 현실에 효율적인 것일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환경 문제에 대한 견해에서는 보다 넓은 관점을 가진 것이면서 충분히 그렇지는 못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그 전폭적인 테두리와 관련하여 해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촘스키 교수는 아베 신조 총리가 원자력 발전의 재가동 결정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여 원자로의 위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일부 환경론자-가령 환경론자 제임스 러브록 그리고 누구보다도 환경 운동과 이론의 전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조지 몬비오트-는 화석 연료로 인한 기후변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이 최상의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촘스키 교수는 이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원자력 발전의 기한을 한정해야 하고 그 한정된 기한 내에 재생 가능한 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원자력 발전을 당장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에 비해서는 더 많은 복합적 요소를 참작한 것이다.

그러나 또 고려해야 할 것은 재생 에너지가 환경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경제사가 리처드 스미스의 계산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을 완전히 재생 에너지로 대체하고 자동차 연료를 전부 전기로 바꾼다고 해도 대기를 오염시키는 온실가스는 17% 줄게 될 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환경 문제의 해결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는 이데올로기적 강변(强辯)이 들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환경 문제의 여러 대안에 폭넓은 고려가 필요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와 철학·경제사를 공부했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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