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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과 지옥의 교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오늘날의 미국시의 특성은 무엇인가. 「뉴요크」대학교의 문학교수이며 「휴머니스트」지의 시 편집자인 M·L·「로젠탈」교수는 그것은 미국의 현대시가 고백적인 자세, 더욱 산만해진 운율적 구조, 그리고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해서 보여주고 있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향을 한마디로 「거대한 다양성」이라고 표현한 「로젠탈」교수의 논문 『오늘날의 미국시』(미「뉴요크·타임스·매거진」게재)를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주>
삵의 희망에 대한 우리들의 변모된 감각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시에 있어서 철저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시의 즐거움도 무엇보다도 자극적인 언어, 의식이 활동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언어를 통한 능동적 발견에서 온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의식의 팽창은 상상력이 현실의 바탕 위에서 민첩하게 작용할 때 비롯되는 것이다. 「질·호프먼」의 시 『랑데부』나, 「마이클·하퍼」의 시 『루번』, 「루번」은 이러한 배경에서 씌여진 작품들이다.
이 시들은 하나의 원초적 낙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지옥의 왕국도 보여준다. 이것은 미국의 현대시가 다양성을 지니고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시가 삶의 비현실화한 의미에 하나의 언어를 제공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야망 있는 젊은이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관해, 혹은 심리적 자각증세에 관해 견강부회적인 불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다른 다양성은 전통적인 지식·도덕·미학을 고려하지 않은 반정부적 혹은 저항적인 것에 대한 대중심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아마도 최근의 재능있는 젊은 시인들이 40년대의 시인들 「월레스·스티븐즈」·「E·E·「커밍스」·「윌리엄·캐로스·윌리엄즈」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월트·휘트먼」으로 대변되는 1세기전의 미국시와 오늘날의 미국시는 어떻게 다른가.
물론 신앙고백주의라든가 투사주의라든가, 정치적인 게임과 같은 오늘날의 시가 보이고있는 경향은 멀리 「휘트먼」으로부터 비롯되어 「에즈러·파운드」·「T·S·엘리어트」·「하트·크레인」등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휘트먼」이 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음조와 「스타일」을 혼합해서 사용하는 기법을 보인 반면 현대시는 여러 층의 격렬성만 단순하게 혼합해서 쓰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체험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쉽게 드러난다. 즉 체험을 개방적·공개적으로 시에 이용하는 것은 너무 개인적이고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것이어서 옳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젊은 시인들에게는 전염성이 높은 것으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또한 예술에 있어서 「현대」라는 개념도 세대에 따라, 받아들이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신앙고백주의자적인 시인들에게서 쉽사리 드러난다. 「실비아·플래스」 등 몇몇 시인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부류의 작품들은 너무 쉽게 자기도취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결함은 신앙고백적인 시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경향의 작품들, 예컨대 꿈이나 추억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찰즈·올슨」·「로버트·덩컨」·「폴·블랙번」 등 투사주의적 경향을 보이고있는 몇몇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내부적인 자각을 「리듬」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바람직한 시의 경향은 또한 몇몇의 정치성을 띤 시각 등에서도 엿보이고 있는데 예컨대 백인·유대인·자유주의적인 흑인사회에 대한 격렬한 시를 쓰고 있는 「이마무·바라카」라든가, 정치성이나 도덕적 자세를 오히려 조정하는 입장에서 시를 쓰고있는 여류시인 「애드리엔·리치」같은 시인들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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