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식 「긴장완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1962년의 「쿠바」위기를 고비로 동서 양대 진영은 이른바 「긴장완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냉전시대를 특징지었던 「전쟁일보 전 정책」을 지양하고 국가간의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데탕트」의 기본취지 자체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긴장완화」의 구체적인 성과로서 핵전쟁의 임박한 위험이 줄어들었다는 것 역시 인류를 위해 진심으로 경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 「긴장완화」라는 것이 세계적화를 위한 공산당의 새로운 전략의 일환이라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넘겨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일찍이 평화공존이란 『세계적 규모에 있어서의 계급투쟁의 최고의 형태』라고 공언한바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긴장완화는 계급투쟁 즉 적화전략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 새로운 적화전략』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점은「흐루시초프」가 물러나고 「브레즈네프」가 들어선 이후에 와서도 「크렘린」의 변함없는 원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은 또한 「레닌」의 저서 『민주주의혁명의 2개의 전술』이 내세운 공산당의 전통적인 기만전술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공산당은 상대방이 약하다 싶으면 폭력을 휘두르다가도 상대방이 강할 경우엔 「평화공존」이다, 협상이다 하는 식의 교활한 기만전술로 탈바꿈을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기만성과 표리부동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불가침조약·동구적화와 「체코」침공·중국의 국공합작과 월남사태에서 한결같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사정은 그때와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키신저」미 국무장관이 「긴장완화」의 신통력을 확신하면서 「모스크바」와 북경을 번질 나게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남사태는 공산주의자들이 바라는 대로 낙착돼 버리고 말았다.
월남에서처럼, 적화의 조건이 일단 무르익으면 긴장완화란「전술」은 금세 무력적화란「원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말하자면 공산당적 사고의 밑바탕인 것이다.
「긴장완화」에 임하고 있는 「크렘린」의 진의는 『서방세계에 대결하는 모든 전선에서 역사적인 공세』를 취하는 데에 있음은 이미 그들 자신의 각종 문서에서도 공공연히 표방되고 있음을 본다.
소련군 참모총장「빅토르·쿨리코프」도 최근 군사관계의 잡지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핵 전력에 있어서의 대미 우위확보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을 요하고 나섰다. 브레즈네프」 자신도 「헬싱키」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구 공산당의 유연노선을 비판한「크렘린」 강경파「자르토프」의 「폭력 혁명론」을 지지, 공산당 본래의 정체를 노출시켰다.
아울러 「헬싱키」정신을 짓밟기라도 하는 듯, 소련의 「헬리콥터」는 「노르웨이」영공을 침범했고, 「포르투갈」공산당을 지원하는 한편, 「아이슬란드」의 어구확대에 반발하는 등 서구내정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 공산당식 「긴장완화」의 위선성은 7·4공동성명에 서명한 바로 그 시각에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 온 북괴의 표리부동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고 있음을 본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군의 날 유시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힘의 뒷받침이 없는 긴장완화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임은』자명한 이치다. 이른바「송양지인」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긴장완화의 참뜻이 평화유지에 있다면 평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전략적 균형과 대공 우위확보는 필수 불가결한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오직 묵묵한 실천으로써 자주국방과 자립경제확립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거짓 긴장완화의 기만성을 분쇄하는 힘이라 생각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