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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전국학련<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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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계몽활동과 함께 전국학련의 중요사업의 하나는 학생공론(후에 학생보) 발간.
전국학련이 발간한 「학생공논」은 일찌기 1946년5월, 「반탁학련」때부터 착수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학생공논」이 발간된 후 곧 주간지 형태의 신문으로 발전한 것이 「학생보」였다.
「학생공논」창간의 의의가 창간사에 뚜렷이 적혀 있다.
『독립 전취의 과정에 있어 학생운동은 국가 건설의 추진력이 되어야 하고 「학생공논」은 학도의 본분과 건국도상에 있어서의 학도의 사명, 애국열을 고취하고자 철성을 발휘하여 건국에 이바지하려는 바이다.』 발간을 준비한지 반년후인 46년10월 말게 에서야 창간된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경난도 재정난이었거니와, 학련 자력으로서의 인쇄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소에 맡긴 것이 공교롭게도 적산인쇄소의 귀속문제로 그 인쇄소가 문을 닫아버리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고, 반탁운동이 격렬한 때여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책 만들 힘을 빼앗겼다.
「학생공논」은 사장부터 편집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생이어서 완전히 학생 힘으로 운영됐다.
사장은 이철승·편집장은 송원영(후에는 정성관), 그리고 편집위원으로는 최찬영 윤원구 이종환 이순종 최원직 강창홍 양홍규 이희갈 김경옥 전진석 이영신 등이 수고했다.
지도위원은 장덕수 박순천 안호상 이선근 선생 등이었고, 편집고문은 소설가인 김광주 선생.
그 내용은 『뚝배기보다 장 맛』이라는 어느 선배의 격려말씀과 같이 당대의 민족지도자 및 교수·학생들의 논설과 학련 활동·「콩트」·수필·시 등의 문예난과 각종 광고에 이르기까지 종합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창간호만 보더라도 내용이 다채롭다.
조소앙선생의 『학생은 민족의 신생명』이란 축사를 비롯하여 김성수선생의 『먼저 애국자가 되라』는 축사, 그리고 원세훈선생의 격려문도 실었다.
장덕수선생은 『미·소회담의 국제적 추이를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자적 입장에서 타개책을 강구하고 민족적 정의와 국론의 통일로써 미·소 양국을 참되게 지도해야 한다』는 글을 썼고. 신익희선생은 『국체와 국호』 란 제목의 글을 쓰셨다.
나는 「건국과 반탁학생의 사명」을 강조하는 글을 실어 『한국식민주주의로 균등사회 건설의 방향과 국제강대국 정치 속에서의 민족자결의 이상』을 밝히기로 했다 (주‥학생공논 창간호 P15∼P21). 나는 계속해서 학생공론과 학생보에 필명 「소석」으로 수차 한국학생운동의 성격과 진로에 관해 투고했다.
현재 나의 아호가 뇐 「소석」은 그 필명의 「소」자만 고친 것이다.
「학생공논」이 「학생보」로 발전하여 1면 정치, 2면 학원, 3면 지방, 4면 문예로「타불로이드」4면의 주보가 된 것은 46년 말, 서울시 지부연맹이 생길 무렵이었다. 배부할 대상으로서 전국학련의 조직이 확대되고 학생건국운동의 내용이 배가 되고 사건이 빈번하여 짐에 따라서 월간을 주보로 바꾼 것이다.
학생보는 각 지부조직을 지사로, 예컨대 학련의 동부지부를 동부지사로 배달망을 조직해서 무료로 배부했다. 물론 각 학교에도 송부했다.
학생보를 내면서 「스케이트」선수였던 이효창군의 기사가 문제됐던 일이 기억난다.
당시 그의 빙상실력은 당연 제1이라서 전국학련에서 「스카웃」하여 고대에 입학시킨 학생이었다. 그가 「런던·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학생보는 『고대 이효창군 「런던·올림픽」동기대회에서 금「메달」획득!』 이라고 주먹만한 활자로 미리 학생보 호외를 인쇄해 놓았다. 그런데 결과는 예선에서조차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많은 호외가 그 후·폐간될 때까지 뒷면을 기사원고지로 사용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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