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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없어도 콧대 높은 실업자 <서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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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베를린=엄효현 특파원】한때「베를린」번화가에서 벌어진 좌익「데모」대열 속의 한 청년이 길가에서 구경하는 한 노동자더러『당신들의 권익을 쟁취키 위해 이「데모」대열에 가담하라』고 하자, 노동자 왈『웃기지 말아, 내가 왜 「프롤레타리아」인줄 아느냐』고 응수했던 이야기는 72∼73년의 최고 호황시절 노상에서 엿들을 수 있었던 대화의 한 토막이다.
그토록 자부하리 만큼 서독노동자들은 지난 7∼8년 사이에 의식주전반에 이르러서는 일반소비생활 면에서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풍요를 누려 오고 있다.
「프랑스」노동자 임금수준보다 30%, 영국노동자 임금의 거의 배에 가까운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서독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늘 주장하는 대로 서독을 경제대국으로 발전시켜 온 절대적인 역할을 맡아 온 주역으로서 우수한 노동자의 자질을 과시해 왔다.
그러나 최근 불황으로 실업자 수가 늘어나면서 이토록 자부해 온 서독노동자와「모럴」이 서서히 무너지려는 징조를 보이고 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실업인구 해결책으로 두통을 앓고 있는 서독정부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실업자 자신들은「코가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고 평을 받을 만큼 직장선택에 많은 요구를 내세워 모처럼 알선된 직장에서 일하기를 꺼려, 실업자로 되돌아가 국가에서 지급하는 실업보조금으로 놀고먹는 버릇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서독에서 실직자가 실직사항의 신고만 하면 과거 소득기준의 68∼85%의 실직생계비에 경우에 따라 실업보조금·자녀수당이 추가된 실업생활비로 실직 전 수입수준의 90%를 정부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 받는 사회 보장의 혜택을 입고 있다. 이 혜택은 평상시 최고 6개월까지 입을 수 있으나 지금처럼 어려운 취업사정으로는 정부가 해당 실직자에게 직장을 소개 못하는 실정이라 최고 3백12일 동안 실직자가 놀고먹고 살 수 있다.
서독에는 국내 실업자의 2배가 넘는 외국인노동자 2백만 명이 있는데 서독사람들은 그 일자리를 마다하고 있다.
외국사람이 취업중인 청소부와「호텔」·식당 등의「서비스」부문만 하더라도 노동력이 5만명 이상 되는데도 서독실업자들은 그런 일은 마다하고 있으며 서독정부가 실직자의 직업전환을 위한 새 직업교육을 이러한 노동시장구조에 맞도록 장려하고 있으나 실직자의 대부분이 이미 교육받은 제 전문직업을 왜 버려야 하느냐고 냉담한 반응이다.
금년 중 2백억「마르크」(4조억원)의 실업자 보호예산을 책정하고 있는 서독정부가 경기회복을 위해 투자환경 조성 책으로 최근 또 금리인하 조처까지 단행하는 등 금년 들어 연거푸 다섯 차례의 호황 보혈제 주사를 거듭 하고도 경기호전 전망이 보이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정부입장과는 달리 「마른 일, 궂은 일」을 여유 있게 고르려 하고 있는 서독실업자의 자세는 내가 왜「프롤레타리아」냐고 했던 앞서의 서독노동자의 주장이 잘 반증해 주는 것처럼 여유 만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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