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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편해진 요리, 그래도 요리사는 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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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필자는 늦게 요리를 시작해 법정 최저임금과 기본 휴무는 받으며 일해 왔다. 그러나 과거에 요리는 참으로 험한 동네였다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듣는다. 주 1회 휴무는 언감생심, 격주 휴무가 보통이었다고 나이 쉰 넘은 선배들은 증언한다. 옆에서는 “뭔 소리야, 한 달에 한 번 쉬었어”라거나 “어허, 설날과 추석에만 쉬었지 아마?” 하는 말도 보탠다. 예순 줄의 선배들이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추억도 많다. 연탄도 아니고 가루 석탄에 물을 개어서 불을 때느라 늘 콧구멍이 새카맣게 그을었다. 불이 꺼지면 큰일이라 아예 식당 2층의 합숙소에서 먹고 자며 새벽에 불을 갈았다고도 한다. 그 시절의 수습 요리사는 대부분 ‘무작정 상경’이 보통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무임 노동을 시작했다. 그때 식당에는 대개 영업용 방이 있어서 그들의 숙소가 됐다. 영업이 끝나 청소하고 이불 깔아 고단한 몸을 누이는 기숙사가 되었다. 어쩌다 받은 휴일에 ‘샤쓰와 나팔바지’ 다려 입고 남산에 놀러갔다는 얘기에 나도 모르게 왈칵, 한다.

더한 말도 듣는다. 가마솥에 밥을 장하게 지어도 전부 손님용이고, 직원들은 남은 누룽지를 먹었다. 반찬이라곤 고춧가루도 넣지 않은 하얀 무짠지가 전부였다고 말하는 늙은 요리사의 말투가 오히려 덤덤하다. 요즘처럼 정육과 손질된 재료가 공급되지도 않아서 요리하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재료 손질에 매달렸다. 깐 마늘과 깐 양파, 손질된 돼지고기가 나온 것도 1990년대의 일이다. 돼지고기는 아예 반 마리나 한 마리를 받아서 일일이 손질해서 썼다고도 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런 표정이다. 주인이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열쇠로 가게 문을 밖에서 잠그고 퇴근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불이라도 났으면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산업재해보상이라는 것도 몰랐다. 일하다 다치면 주인이 치료비를 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크게 다쳐 노동력을 상실해도 하소연할 데도 없던 시절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연탄불 때던 시기에 일하던 요리사들은 상당수가 호흡기질환 등을 직업병으로 얻었을 것이다. 지금은 입증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연탄가스에 중독 사망자가 매일같이 신문에 나던 때였으니 말이다.

이 지경은 아니지만 요즘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탁자 하나라도 더 놓아야 하니 주방은 비좁아 터졌고, 주방은 한여름 열기를 견뎌낼 냉방시설도 거의 갖추고 있지 않다. 으레 요리사란 그런 열기를 접하는 일이라고 해도, 주인의 양심에 기대어 ‘선처’를 바라는 수준이다. 관계 법률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주방 작업 환경에 대한 표준적 시안이 나와서 널리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 한철을 불구덩이 화덕 앞에서 보낸 요리사가 이듬해 여름이 다가올 무렵 출근을 거부했던 일이 생각난다. 얼음조끼를 입고 일하던 친구도 있었다. 국민소득은 2만 달러가 넘고 우리도 ‘선진국’이라는데, 도대체 식당 주방은 그다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날씨가 슬슬 풀리니 문득 올여름을 어떻게 맞을까 벌써 걱정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chanilpa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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