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10)|전국학연-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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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화가산생활>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궁측통(궁측통)으로 즉각 둘러댔다.
담벼락 너머로 던져버렸다고 팔을 꺼내고는, 그러나 술에 취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고 잡아떼었다. 결국 나와 조군은 사흘동안 영창을 살고 나왔다. 다행이었다. 만일「이시가리」(석수) 육군 형무소에 끌려가면 추운 겨울에 알몸으로 얼음물 속에 처박히는 것은 물론 잠을 안 재우는 온갖 기합을 다 받아야했다.
우리가 형무소행을 면한 것은 증거가 불충분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당하면 중대장 역시 책임을 면치 못 하기 때문에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은 것도 같았다.
우리가 영창에 있는 동안 조선학병들은 연일 단체기합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건의 전말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끝내 누설하지 않았다.
나는 그 뜨거운 동포애에 몇번이나 콧등이 시큰했다. 이렇게 해서 풀려난 나는 곧 부대전속을 받아야했다.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병약자까지도 입영하고 보충병력의 증편 계획에 따라 병력이동이 이루어졌다.
나는「와까야마」(화가산)현 해남에 있는 보병 연대의 병참부대로 전속됐다.
조선학병 42명중 조진대·박종준, 그리고「시미즈」(준수)라고 창씨 개명한 김군등이 같이 갔다.
미군상륙을 결사 저지하는 일이 우리의 임무였다. 당시 화가산은 미군의 상륙 예정지라는판단에 따라 이 지역에 옥쇄할 병력을 배치했다. 땅굴도 매일 팠다. 일단 유사시에 우리는 총알받이로 전투에 나서게 되는 것은 물론 산속깊이 파놓은 대피소까지 쌀·콩등 보급품을 말 구루마로 운반해야했다.
그러나 화가산 해남땅은 너무도 아름다운 곳-. 뒤엔 산, 앞엔 바다, 그 사이에 띄엄띄엄 있는 관서지방의 화족과 재벌들의 별장은 그대로 한폭의 풍경화였다. 나는 말 구루마에 짐을 싣고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한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거듭 되새겼다. 가다 지치면 담배 한대를 피워 물고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화가산은 일본의 밀감 생산지로도 유명한 곳. 남자들은 전장에 나가고 젊은 여인들만 산
등성이 밀감 밭에서 일했다. 일하며 부르는 애수 띤 일본 민요는 나를 더 없는 감상에 젖게 했다. 그때가 마침 4월, 어쩌다 한가할 때면 나는 해변가 승마「코스」를 따라 거의 졸다시피 말위에 앉아 사색에 잠기고 때로는 질풍같이 달려봤다. 그러면서 사랑과 죽음, 민족과 역사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의 군대생활은 상등병이 되고 난뒤 좀더 부드럽고 편안해졌다. 어느덧 나는 고참병이 되어 선임상등병으로 내무반장이 됐다.
우리 반에 일인신병들이 들어와서 일본 학병만도 10여명이 됐다. 나는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되도록 그들에게 기합을 주지 않았다. 내가 당했던 기합을 생각하면 절치부심 할 일이 많았으나 일본인보다는 조선인이 더 너그럽다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그럴수록 일인신병들은 쩔쩔맸다. 부모들이 면회와서 주고간 음식을 먹기도 전에 갖다 바치기도 하고 어쩌다 외출 나갈때면 책도 구해왔다. 나는 받은 음식은 우리학병들에게 나누어 줬다. 책은 내무반 「매트리스」밑에 감춰두고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은 대부분 사회주의관계 서적들로 그때는 독립이 문제지 「이데올로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은 여러 학병들에게 돌려서 읽게 했으며 가끔 토론도 했다.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는 것이냐. 만일 우리가 살아남아 독립이 된다면 우리는 미국에 붙어야 하는냐, 소련에 붙어야하느냐 38선은 아예 상상조차 못한 우리는 캄캄한 암흑과 진통 속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다듬어 나갔다.
내가 내무반장으로 있는 동안 조선학병들은 많이 먹고 자고 책도 읽게 됐다.
이런 중에도 B-29기의 폭격은 계속 됐다. 경도 신호는 이미 초토화됐고 화가산성이 불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 나는 탈출을 정면으로 생각했다. 잘못하면 지금까지 천신만고해서 살아온 목숨을 연합군의 폭탄에 뼈도 찾지 못하거나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죽어야 했다. 그러나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동안 역사는 급전했다.
8월6일엔「히로시마」(광도)애 세계 최초의 원자탄이 투하되고 8일엔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9일엔 또 다시「나가사끼」(장기)에 제2의 원자탄이 떨어졌다. 그리고 10일엔 마지막 전시내각의 수상인「스즈끼」(영목)가 긴급비상 각의를 열고 일본의 항복문제를 협의했으나 육상인「아낭」(아남)이 항복은커녕 최후 항전과 전 일본군의 옥쇄를 주장하여 혼선을 빚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외상인「도오고」(동향)는 그 자신이 직접 동경국제영어방송에 나가 「천황의 신분만 보장된다면 일본은「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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