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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억달러 쟁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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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이라크가 유엔에 맡겨놓은 수백억달러의 석유판매 대금을 놓고 미.영과 프랑스.러시아.독일이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돈은 걸프전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로 이라크인들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자 유엔이 1996년 마련한 '이라크 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으로 조성된 돈이다.

당시 유엔은 이라크의 무역거래 대금이 사담 후세인 정권의 무기개발 자금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유엔 감독 아래 식량과 석유를 맞바꾸는 일종의 물물거래 방식을 도입했다.

즉 외국의 중개회사가 이라크를 대신해 석유를 국제 원유시장에 팔아주면 그 돈을 유엔의 계좌에 입금시키고, 이라크에 지원할 식량.의약품.생필품 구입 자금을 같은 계좌에서 빼쓰도록 했다.

유엔은 돈의 규모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모스크바 타임스는 24일 "약 4백억달러의 잔액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유엔 계좌의 잔액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물밑 각축전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 21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후에는 유엔이 (자금처리에) 중심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도 비슷한 발표를 해 이 돈을 전후 복구자금으로 사용할 의도를 내비쳤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프랑시스 메르 재무장관은 즉각 "전후 복구 비용은 미국과 영국의 문제"라며 돈을 넘겨줄 수 없다는 뜻을 강력히 시사했고, 세르게이 라브로프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도 "유엔이 운영해온 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에 변화를 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재건사업에 이 돈을 쓰겠다'는 속셈이고, 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의 중개 역할을 독식해온 프랑스.러시아.독일 등은 '우리가 받을 돈에 손대지 말라'고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유엔 측은 이 돈을 이라크 재건사업에 쓸 수 있게 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마련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위원장이 독일의 귄터 플루거 유엔대사라서 결과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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