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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하면 누가 먼저 화해 청하나" 칠레 대사 마음 편하게 해준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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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13년 3월 13일 저녁 새 교황 선출의 역사적 현장, 베드로 광장에 마련된 특별 구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가까이 지켜 볼 수 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신자들에게 자신을 가리켜 교황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로마의 주교’라고만 하던 교황, 인사말 끝에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며 신자들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이던 교황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경탄스러운 행보는 일일이 말하기도 어렵다. 지난해 취임 직후 대사들을 접견하는 자리였다. 일흔을 훨씬 넘긴 칠레 대사 부부가 앞에 섰을 때 교황과 이들 부부가 파안대소했다.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니 교황이 의례적인 인사 대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두 분이 부부싸움을 하면 누가 먼저 화해를 청합니까?” 대화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교황의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바탕은 수도 사제다.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격식을 간소화한다. 물자나 시간이나 모든 것을 철저히 아끼고 절약하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 선출 회의에 참석하기 2~3일 전이었다. 우연히 어느 방명록에 남겨 놓은 친필 서명을 볼 기회가 있었다. 확대경이 있어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얼마나 깨알 같은 글씨였는지 모른다. 필경 자신을 낮출 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이라도 아끼려는 생활 습관이 거기에도 배어 있었던 것이다.

 서명 얘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말해볼까 한다. 원래 교황이 발표하는 공식 문헌의 말미에 직위와 함께 이름을 적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위는 빼고 자기 이름으로만 서명을 한다.

 교황이 친히 주재하는 전례도 간소화해 시간이 적지 않게 짧아졌다. 특히 가톨릭 신자가 아닌 외국 대사들은 내심 꽤나 좋아하는 눈치다. 알아 듣지 못하는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두세 시간 이상 참석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모든 행사가 시간이 줄어든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주례 일반알현이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30분에 교황이 로마에 모여든 순례자들과 만나는 이 행사가 전에는 한 시간 좀 넘으면 끝났었는데 지금은 교황이 수많은 순례자들, 특히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 병자들을 일일이 만나 위로하고 축복해 주기 때문에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다.

 지난 11월 초 이임 인사 차 교황을 알현했을 때 “한국 교회는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신부 덕분에 시작됐고 첫 신자에게 세례를 준 것도 예수회 신부이니 이제 예수회 출신 교황님이 방문해서 격려해 줄 차례입니다”라는 필자의 말을 듣더니 교황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선선히 화답했다. 기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었다. 조금 뒤 너무 앞서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약간의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교황은 그때 한 말대로 드디어 한국을 찾아온다.

 행동하는 개혁가, 평화의 사도로 찾아 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계기로 이 땅에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문화가 더욱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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