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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 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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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플라톤」은 시와 음악을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요새 말로 퇴폐풍조를 조장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달랐다.『「스파르타」사람들은 패권은 잡았으나 한가한 생활을 보내는 방법을 몰랐다. 전투적인 수련과는 또 다른 더 고상한 수련을 아무 것도 쌓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아리스토텔레스」는<정치학>에서 말했다. 이와는 다른 뜻에서 동양사람들도 예부 터 음악을 소중히 여겼다. <예기>의 악기 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짐승은 성만 알고 음을 모른다. 보통사람은 음을 알고 악을 모른다. 군자만이 악을 안다. 이 악은 사람의 마음속에 움직이며 악에 의해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가 지탱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이 유용한 것이 아니니까 중요하다 했고, 유교에서는 유용하니까 중요하다 했다.
어떻든 음악이 사람들을 울고 웃기며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요새 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들은 모두가「스타」와 유행가의 가수들이다. 그만큼 유행가의 영향력이 크다는 얘기도 된다.
유행가는 어디서나 들린다. 고속「버스」속에서도, 비행기 속에서도 유행가를 들려준다. 안방에서 보는「텔리비젼」속에서도 유행가는 판치고 있다.
그런 유행가들은 모두가 신통하게도 닮은꼴이다. 우선 가사들이 그렇다. 옛사랑·몸부림·달·창가·밤·아아·항구·눈물·비…. 여기에 곁들인「멜로디」도 애조를 띤 것들이 많다.
도시 유행가란 서민들의 정서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감상에 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더욱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가요는 어느 나라나 구성지고 퇴폐적인 면이 없지 않다.「프랑스」의「샹송」이 그렇고, 이태리의「칸초네」가 그렇다. 미국의 「컨트리·뮤직」이며「포크·송」에도 실연·고독감·향수 등 인생의 패배를 노래한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퇴폐적이라고만 보지는 않는다. 듣는 사람들도 오히려 묘한 감정의「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수가 많다.
최근에 모든 공연물과 음반을 사전검사 하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검사의 기준은 주로 퇴폐풍조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퇴폐」란 가려내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황성옛터』도 보기에 따라서는 퇴폐적이 된다. 패배와 좌절감에 빠진 약자의 영 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퇴폐」를 반 도덕과 같은 뜻으로 여긴다 해도 마찬가지다. 뭣이 반 도덕인지 그 기준을 분명히 가리기 전에는 건전 가요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칫하여 모든 노래가 위 정 시의 살벌하고 딱딱한 그「국민가요」가 된다면 이런 노래를 부를 대중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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