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체크」한상철(연극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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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3세를 다 못 채우고 요절한 독일의 천재적인 작가 「게오르그·뷔흐너」(1813)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사라 하면 치욕스러워 언제나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일이 있다.
그로부터 1백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가 남긴 3편의 희곡 중의 하나인 『보이체크』를 보면서 역시 인간의 역사가 치욕스러워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역시 그리고 여전히 티끌이고 똥이고 짐승이기 때문이다.
가난하나 선량하고 지성은 없으나 지나치게 예민한 감성을 타고난 이발사이며 군인인 「보이체크」, 그는 중대장의 폭력적인 위험과 주위의 힘있는 자들의 조소와 희롱에 고문당하며 완두콩만 먹여 인체의 생리를 연구하는 의사의 호기심의 제물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써는 어쩌지도 못하는 그로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짓누르며 차차 심해지는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악대장과의 부정한 짓을 보고 고통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의사의 총에 맞아죽는다.
실제 이발사인 군인이 질투로 그의 정부를 살해한 사건과 그 군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냐 아니냐로 법정의 토론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있지만 「뷔흐너」는 그것을 치정 살인의 「멜러드라머」나 정신분석적인 연구가 아닌 보다 높은 차원의 보편성으로 승화시켜 인간 실존의 본질을 단순하면서도 날카롭게 묘파해 놓고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생은 광적이고 더 할 수 없이 괴로우며 구원의 길이 없다. 인생에는 아무 목적도 없고 인간의 모든 노력은 무익할 뿐이다.
이 극은 자연주의 연극의 선구이면서 그 효과는 오늘날 「부조리연극」의 그것과 동일하다.
「스토리」의 전개나 주제의 발전을 포기하고 27개(다른 판은 28개)의 장면을 핵분열 식으로 병렬시킨 구성이 주제의 점층적 대폭을 방해할 듯 싶지만 오히려 「보이체크」와 「마리」에게 구체적인 개성을 부여하고 주위의 인물을 유형화함으로써 이 극이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더욱 뚜렷이 해주고 있다.
「뷔흐너」의 극적 「이미지」를 농축시키는데 최선을 다 한 연출자(안민수)의 상상력이 살만하고 특히 비극적인(너무 비극적인 것이 흠이었지만) 「보이체크」역을 맡은 추송웅의 변신은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감탄할만하다.
창녀면서 창녀를 뛰어 넘어갔어야만 될 「마리」역의 김순희는 그러나 신인으로서는 값진「데뷔」였다. 동구의 냄새를 짙게 풍겨준 변창순의 의상이 아니었더라면 너무나 단순·단조하게 처리된 무대에 생활을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악은 재고되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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