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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고객 손실로 이익 내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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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확 줄어든 연말정산 환급금에 놀라 연금저축을 들기로 했다. 내년부터 돌려받는 세금이 줄어든다지만, 그나마 몇 안 되는 절세상품이니 말이다. 은행에 가니 창구 직원이 반겨 맞는다. 그가 권한 상품은 한 보험사의 연금저축보험. “금리가 은행보다 높아 유리하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돌아나왔다. 손해를 보고 보험을 깨본 경험이 있어서다. 다른 보험처럼 연금보험도 수수료를 뗀다. 적게는 원금의 6%, 많게는 8% 이상이다. 고객이 낸 돈 몇 달 치는 은행과 보험사가 나눠 갖는 셈이다. 적어도 5년 이상 지나야 원금이 될까 말까 해진다.

 옆에 있는 다른 은행 지점으로 들어섰다. 차이가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 연금저축보험을 추천했다. “은행원들도 이걸 든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또 다른 은행 지점에선 처음부터 원금이 보장되는 걸 들고 싶다고 했다. 직원이 할 수 없다는 듯 “연금저축신탁이 있다”고 했다. 연금보험과 똑같은 세금 혜택을 받는 은행의 연금저축 상품이다.

 이상한 일이다. 어느 회사나 자기 물건을 팔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은행들은 거꾸로다. 은행상품이 아닌 보험상품을 팔려고 열심이다.

 알고 보면 은행원에겐 당연한 일이다. 연금신탁은 은행이 책임을 지고 원금을 불려줘야 한다. 수익은 고객의 가입기간에 비례해 조금씩 꾸준히 난다. 연금보험은 반대다. 돈을 돌려줄 책임은 보험사가 지고, 은행은 수수료만 챙긴다. 그것도 가입 1~2년 내에 대부분을 받아간다. 신탁을 팔면 십수 년 동안 얻을 이익을 단기간에 챙길 수 있다. 시스템도 이를 부추긴다. 고과와 승진을 미끼로 직원들이 신탁보다 보험을 팔도록 장려한다. 창구직원부터 은행장까지 모두가 수익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 고객이 설 자리는 없다. 모든 연금저축은 최소 5년간 유지해야 절세혜택을 본다. 안 그러면 해지 시점까지 쌓인 돈의 24.2%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소득공제로 돌려 받은 세금 이상을 물어내기 십상이다. 하물며 원금도 회복하기 전인 연금보험을 해지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금융위원회의 지난달 발표에 따르면 연금보험을 5년 이상 유지하는 사람은 70%를 겨우 넘는다. 10년 넘게 가입해 제대로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52.4%에 불과하다. 고객의 손실을 기반으로 은행 수익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이해상충은 장기예금 등 다른 상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지속가능경영이나 사회책임경영과 거리가 먼 ‘비상식’ ‘비정상’이다.

 얼마 전 한 은행장이 이런 구조를 바꾸겠다고 나섰다. 이건호 국민은행장이다. 그는 고객의 노후 대비에 도움이 되고, 은행에도 안정적인 수익을 내주는 은행상품을 많이 팔겠다고 했다. 이런 직원이 대우받도록 평가 기준도 새로 만들겠다고 했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다른 은행들의 동참도 기대한다. 그래야 고령화 걱정도 덜고, 은행이 고객과 오래오래 공존공영할 수 있다.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