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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G 이끄는 두 얼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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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휜·탄·파트」 수상>
마르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파트」(62)는 「사이공」의 새 공산 정부의 제1인자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베테랑」 공산주의자이며 공산 PRG의 이론가인 그는 「하노이」정치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노이」에서 교육받은 「파트」는 청년 시절부터 골수 공산주의자였으며 2차대전 때는 청년 지하 잡지를 발행하고 민주당을 조직하는 등 지하 항일 투쟁을 벌였었으며 일본 패망 후 그는 남쪽으로 내려와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반불 투쟁 활동을 조직했다.
불인들은 두 차례나 그를 투옥했으나 그는 「베트민」 정보국장 겸 「베트민」 남부 저항 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속 활약했다.
54년 「제네바」 협정을 체결할 당시 그는 월명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했으나 그는 계속 남부에 남아 반 「디엠」 정부 지하 「게릴라」 운동을 조직하고 그의 지하당인 민주당을 부활시켜 자신이 서기장이 되기도 했다. 61년 「하노이」가 NLF의 존재를 밝힐 때 그는 NLF 상임 간부회의 부의장이었으며 그후 서기장이 되었다.

<구엔·후·토 평의회 의장>
『「토」변호사』라면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월남인들 사이에 알려져 있으며 NLF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고무 농장 지배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파리」에 유학하여 1932년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월남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었다.
일본군 철수 후 「토」는 호지명의 「베트민」 지하 운동에 참여하여 반불 독립 투쟁을 벌였다.
50년에는 미 해군의 월남 파견에 반대하는 월남 최초의 반미 항의 「데모」를 조직하다가 불인들에 의해 체포, 「디엔비엔푸」 부근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2년 후 단식투쟁 끝에 석방되었다.
54년 「베트남」을 양분한 「제네바」 협정 후 그는 평화 수호 「사이공」·「촐론」 운동을 이끌다가 「고·딘·디엠」 정권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61년 탈옥했는데 1년 후 그는 NLF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확인되었다.
65세인 「토」는 안경을 낀 점잖은 교수 「타입」이지만 열렬한 민족주의자고 명민한 정치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69년까지만 해도 가장 중요한 NLF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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