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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 치하 첫날의 「사이공」|불안과 환호 범벅… 30년 내전의 종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베트콩」과 월맹군은 30일 「탱크」를 앞세우고 「사이공」시에 무혈 입성, 대통령 관저 독립궁에 「베트콩」 임시 혁명 정부기를 꽂았다. 「베트콩」 치하 첫날의 「사이공」 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거리를 자유로이 거닐며 대부분이 10대 소년인 「베트콩」 및 월맹군 병사들과 악수하고 담소했다.

<통금 실시·직장 복귀령>
「베트콩」은 이날 하오 6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야간 통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하고 모든 공무원들에게 직장 복귀를 호소했다. 이날 8명의 「베트콩」 병사들이 탄 선도 「지프」 1대가 「베트콩」기를 펄럭이며 미 대사관 근처 거리에 들어서고 뒤이어 6대의 「탱크」들이 뒤따랐다.
수 많은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입성을 환영했으며 건물마다 항복을 표시하는 백기와 「베트콩」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30분 후 녹색 군복 차림의 월맹군들이 월맹기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탱크」가 구내에 멈추자, 「베트콩」 병사들이 뛰어나와 산개, 전투 태세를 갖췄으며 정부군들은 손을 들고 나와 정렬, 명령을 기다렸다. 「베트콩」 병사들은 곧 국기 게양대에서 월남기를 끌어내리고 「베트콩」기를 게양한 뒤 예포를 쓰며 승리를 축하했다.
첫 「탱크」가 진입할 때 기자가 「카메라」를 갖다 대자 「베트콩」 병사는 총을 겨누며 촬영 중지를 명령했으나 독립궁 점령이 끝나자 병사들은 기자들에게 다가와 웃으며 악수했다.

<월 사진 기자가 vc간부>
이에 앞서 「민」 대통령은 독립궁에서 월남 임시 혁명 정부(PRG) 대표와 만나 악수를 교환했으며 뒤이어 곧 「사이공」 방송은 「민」 대통령이 PRG에 정권을 이양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가장 놀라운 사실은 지난 수년 동안 AP통신에 사진을 맡아 온 한 월남인이 「베트콩」·방송이 발표한 「베트콩」 간부 명단에 끼여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키·남」이라는 36세의 이 월남인은 지난 3년 동안 AP통신에 사진을 제공해 왔었는데 AP기자들은 바로 이날까지도 그가 「베트콩」 간부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베트콩」 간부로 둔갑한 「키·남」은 이날 1명의 「베트콩」 친구와 2명의 월맹군 상사를 대동하고 AP통신 사무실을 찾아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안전은 내가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중부 「쾅남」성 출신의 「키·남」은 이날 『나는 10년 전부터 혁명 활동을 해 왔다』고 되풀이하면서 『「베트콩」에서의 나의 임무는 국제 언론과의 연락을 취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지 30분 뒤에 AFP통신의 「페테르·고르멩레이」 기자는 관광객처럼 「사이공」의 한 큰 거리를 거닐면서 미소를 짓는 「베트콩」군인 10여명과 악수를 하고 「사이공」시의 표정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시 주요 거리들에 30m간격으로 배치된 젊은 「베트콩」 군인들은 곧 집에서 쏟아져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는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공산군 군인들은 수개월 아니 수년 동안 금욕적인 「게릴라」 생활을 겪은 끝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게 된데 대해 젊은이다운 수줍음조차 나타내고 있었다.
신발은 호지명 「샌들」이었고 중공제 AK-47 자동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잔류 기자들 분주히 취재>
소년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이들 병사들은 그들을 둘러싼 군중으로부터 악수의 공세를 받으면서 어쩔줄 몰라 했으며 군중은 이렇게 당황하는 그들의 어깨에 손을 얹어 격려했다.
이날 「사이공」의 거리들에 나온 시민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새로 만든 「베트콩」 기들을 흔들었으며 「베트콩」 장갑차 행렬에 끼어 들기도 했다.
일부 정부군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촐론」가에서 계속 항전했으나 저항도 저녁에는 끝났다. 「베트콩」군이 「사이공」의 국제 무선국을 접수한 직후 잠깐 동안 외부와의 통신은 두절됐지만 곧 재개됐고 UPI통신 「텔리타이프」도 끊어졌다간 이어지곤 하면서 계속 움직였다.
「사이공」 방송도 약30분간 방송 중단됐다가 다시 계속되면서 정부군 참모 차장 「윈·후·한」 준장의 항복 방송을 되풀이했다.
기자들이 「사이공」 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UPI통신의 송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했더니 「베트콩」측 대표라는 사람이 『대단히 미안합니다. 잠깐동안 해외 교신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회복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황혼 들자 총성도 멎고>
과연 조금 후부터 송고가 재개됐다. UPI 사진기자 「호앙·반·쿠옹」은 「베트콩」들과 함께 「탱크」에 올라타고 독립궁 광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공산군들은 「쿠옹」 기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고 환담했다.
대부분의 「사이공」 시민들은 말없이 그들의 정복자를 바라보았다. 일부 사람들은 「베트콩」을 환영했으나 대부분은 무관심하게 관망하면서 공산 치하에서 올 불안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령의 첫 단계인 현재 「베트콩」군은 그들이 오랜 장기전에서 보인 규율을 승리의 순간에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 그들은 「탱크」와 「트럭」 위에서 시민들에게 웃기도 했으며 몇몇은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세계 최대 공산 강국의 무기로 무강한 엄격한 집단이었다.
공산 방송이 평화 해방일이라고 부른 이날 「사이공」서 가장 슬픈 사람은 아마 미국인을 위해 일했으나 출국 못하고 처진 월남인들일 것이다. 이들은 틀림없이 공산군의 보복 대상이며 절망적으로 그들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황혼이 내려 덮이자 정부군이 항전하는 산발적인 충성도 점점 줄어갔다.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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