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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향간첩 김일동씨 참회의 수기|김일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일동씨(49)는 69년11월 일본에 밀입국한 뒤 73년12월까지 만4년 동안 「오오사까」등지에서 암약한 북의 공작원. 「플라스틱」 수족관상으로 위장, 남한의 공작원들과 평양본부간을 이어주는 중계거점 등을 구축하던 중 새 지령을 받기 위해 일인명의의 위조여권으로 동 「베를린」에 빠져나가려다 「하네다」공항서 일경에 붙잡힌 끝에 전향했다. 원래 경북 안동출신의 출판사원이었으나 6·25때 민청에 가입, 그 해 가을 북행대열에 끼게 되고 이후 23년 동안 이북에서 이른바 「붉은 전사」, 출판사원, 운수관계부처 간부 등의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간첩의 신세에까지 이른 것. 이 수기는 그가 걸어온 인생에 대한 참회와 속죄의 숨김없는 기록이다. 그는 현재 6·25때 두고 떠났던 아내와 두 남매 등 일가족과 재회, 대구서 단란한 가정을 되찾아 있다. 【편집자주】
나는 간첩번호 제1336호 「북에서 온 사람」이다. 69년11월5일 하오 일본어선으로 위장한 고속 공작선을 타고 북부 일본 청삼현 서진경군 암기해안에 침투, 73년12월2일 체포될 때까지 4년1개월17일 동안 나는 노동당 연락부의 충실한 세포였다.
나의 임무는 북송된 재일 교포 5명의 재일본 친척들을 포섭, 남한 안의 우리 조직과 평양 본부간의 연락을 보강하는 중계거점을 이룩하고 각종 기밀을 입수, 암호보고서 등을 통해 북에 보내는 역할이었다.
공작 수행은 매달 2일과 3일 0시 어김없이 날아드는 북의 A3 단파방송을 통한 암호지령을 청취, 지시대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실제에 있어 사전에 밀명을 띠고 온 5명의 포섭대상자 회유에는 실패했지만 새로 1명을 좌경시켜 동 「배를린」으로 보냈으며 기타 남한의 각종 군사기밀과 포섭대상자들의 「리스트」를 북에 보내는 등 적잖은 활동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활동한 만큼 조국의 안보를 해친 꼴이어서 지나온 행로를 털어놓기엔 부끄러운바 크지만 내가 경험한 「북」과 나의 공작역할을 솔직히 전하는 것이 긴장의 도가 높아가는 오늘날의 안보생활을 가다듬는데 보탬이 되고 그것이 지난날의 죄과를 속죄하는 그나마의 길이라고 믿어 이 수기를 엮는다.
6·25가 터지던 1950년 나는 서울 종로구 장사동 전 종로3가 파출소 뒷골목에 있은 대한인쇄소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주인은 족청 장사동단부 부단장이기도 했던 정희산씨(당시 40대)였으며 종업원은 20여명.
나는 안동군 일직면 국곡동의 구장이시던 중농 부친의 7남매중 장남으로 일직보통학교·대판공고를 나와(2년 중퇴) 고향면사무소의 재무서기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으나 시골에서 썩기가 싫어 48년 봄부터 상경해 있었다. 백부(김창한)가 종로5가서 공 굴리기 유기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 나는 처음 이 백부의 유기장에서 일을 했으나 이듬해 장사동의 을종 요정 경일각에 서사(회계)로 취직했다가 우연히 족청에 들게되어 부단장인 정희산씨의 대한인쇄소에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그때는 각종 단체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앞을 다퉈 가입을 권유할 때라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가 새 일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이미 해방 전해에 아내(유화계·현재 48)와 결혼, 맏딸 정숙과 맏아들 대현군까지 둔 행복한 아빠였으며 뚜렷한 의식이 없어 그렇지 「이데올로기」를 굳이 따져도 엄연한 우익청년단원이기도 했다.
6·25가 터진지 불과 수일, 서울은 눈 깜짝할 새 붉은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어물어물하다 피난길을 놓친 나는 며칠 뒤 뒤늦게 가족들을 끌고 뚝섬으로 빠져나가 봤으나 그곳도 벌써 공산군이 지키고 있어 움츠리고 뛸 재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 수 없는 숨은 나날의 포로가 아니될 수 없었다.
며칠을 불안 속에 보내던 나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증을 풀 수 없는데다가 월급이라도 탈까하고 장사동 인쇄소에 나가봤다. 용지 등을 벌써 북의 군대가 털어가버려 공장은 텅 비어있었으나 나처럼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동료들은 상당수 나와 있어 그런 대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거리가 있을리 없었지만 별일도 안 일어나고 해서 자연 날마다 공장에 나가다가 나는 마침내 나를 노리는 붉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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