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일 파국 막는 건 건강한 시민의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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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02면

어제 제9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에 과거사 반성을 촉구했다. 지난해 기념사엔 다루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언급했다. 최근 두드러진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분명한 견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일제 시절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군·관헌의 개입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河野)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검증이란 곧 수정이나 폐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고노 담화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끄러운 역사인 위안부에 대한 현대 일본 정부의 인식을 담은 역사적 문서이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95년의 무라야마(村山) 담화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가 이를 수정 또는 폐기한다면 무라야마 담화 역시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지금 침략전쟁에 대한 전면부정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수작이다.

 그렇게 이웃을 자극하고 대립을 부추기는 저의가 뭔가. 장기 불황, 대지진, 원전 사고 등으로 패배의식에 절어 있는 일본 사회에 강한 구심력을 촉발시키려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아베노믹스라는 경기부양책의 효과 덕에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경제활력을 높이는 데 이미 성공했다. 굳이 지저분한 수법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극우세력의 준동과 그에 편승한 일본 정부의 우경화는 멈출 줄 모른다. 거리의 혐한(嫌韓) 시위는 인종차별 행위로 국제적인 우려를 살 지경이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도덕적 일본인은 아예 씨가 마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작정하고 국제적인 민폐를 끼치고 있는 일본 우익들은 경제 선진국 속의 ‘도덕적 열등부족’이다. 그들의 무력시위로 수많은 우리 교민의 신변안전이 우려된다.

 한국과 일본의 양식 있는 국민들은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고 냉정해야 한다. 서로 깊숙한 경제·문화 교류를 해온 양국은 언제까지나 담 쌓고 지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일본이 과연 아베를 지지하는 우익의 요구처럼 한국과 단교하고, 최악의 경우 한국을 적성국가로 대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도 되돌아 볼 게 있다. 반일이다, 친일이다 하며 일본과의 관계설정을 정치적 도구나 정략적 프레이밍으로 사용하곤 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국민 감정을 불필요하게 자극한 탓에 냉철해야 할 외교를 감정에 휩쓸리도록 방치한 건 아닌가.

 한·일 관계 회복엔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성찰, 상대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면 양식 있는 국민들이 먼저 실천해야 한다. 특히 일본의 보수적 국민들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성찰하는 계몽적 시민의식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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