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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결정 내리는 고독한 자리 … 전문성 기본, 뚝심도 필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거의 불가능한 업무(near-impossible job)’. 2012년 9월 영국 재무부가 낸 중앙은행(영란은행·BOE) 총재 모집 공고를 당시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렇게 평했다. 그럴 만도 했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공고에선 총재 직무를 이렇게 묘사했다. ‘통화·규제 정책을 수립하는 BOE의 장(長). 통화정책위원회와 금융정책위원회, 건전성감독원을 이끌며 G7·G20이나 유로시스템리스크위원회, 국제결제은행의 주요 국제 회의에서 은행을 대표함’. FT는 한 금융 전문가의 입을 빌려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확장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다음달 교체될 신임 한국은행 총재를 둘러싼 세간의 기대를 FT 식으로 표현하자면 ‘거의 불가능한 존재(near-impossible being)’ 정도가 아닐까. 가계부채와 신흥국 위기 등 안팎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면 거시경제와 통화정책에 대한 전문성은 기본이다. 정부나 시장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책을 밀어붙이려면 뚝심도 필요하다. 한은 총재 중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만큼 도덕성은 필수다. 국제 경제의 영향이 날로 커지고 국제 공조도 중요하니 영어도 잘하고 국제 네트워크도 있어야 한다. 이러니 “철인이 아니고선 중앙은행 총재를 할 수 없다”는 탄식까지 나온다. 신임 총재 지명이 예정보다 늦어지자 “시장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인재가 없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중앙은행의 역할과 이를 수행할 ‘철인 25호’, 제25대 한은 총재의 자격을 살펴본다.

세계적으로도 1990년대까지 중앙은행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30년대 대공황 이후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부각되긴 했지만 금융시장은 태생적으로 ‘중앙’의 간섭을 꺼렸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도 ‘선거를 통하지 않은 권력’인 중앙은행이 세지는 걸 원치 않았다. 세계 중앙은행 제도의 모범국인 영국이 영란은행에 물가 목표치를 제시하고 이를 지키는 데만 전념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에선 97년까지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의장을 재무부 장관이 맡았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던 시절이다. 한은 총재의 역할이 미미했던 건 당연했다.

중앙은행 총재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교과서’를 새로 쓴 건 벤 버냉키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다. 미국도 Fed의 임무를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으로 못박아두고 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버냉키는 미국을 넘어 세계 경제의 구원투수로 부상했다. 그의 한마디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사상 최장기 초저금리 정책에 이어 세 차례에 걸쳐 달러를 무차별 살포한 양적완화 정책으로 미국과 유럽 경제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이후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와 일본은행의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가 버냉키를 모방했다.

3월 말 김중수 총재의 퇴임을 앞두고 한은 총재라는 자리가 새삼 부각되고 있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2200명의 ‘국내 최고 두뇌 집단’을 거느렸다는 싱크탱크, 350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7위 외환보유액,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금통위를 품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국내에서 한은 총재의 역할이 선명하게 부각된 건 97년 이후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은은 50년 숙원사업이던 한은법 개정을 쟁취해냈다. 재무부 손아귀에 있었던 금통위를 탈환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한은은 은행감독권을 정부에 내줘야 했다.

당시 한은은 축배를 들었지만 이 반쪽짜리 승리는 두고두고 한은의 발목을 잡았다. 버냉키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파산 위기에 빠진 월가 은행에 직접 구제금융을 쏴줬다. 그 덕에 Fed는 월가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Fed가 초대형 금융지주회사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에 비해 감독권을 잃은 한은은 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회가 구조조정의 칼을 휘두르는 걸 팔짱만 끼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은이 스스로를 ‘남대문의 상아탑’이라고 자조하는 것도 팔다리를 잃은 채 머리만 남은 현실을 빗댄 말이다.

그나마 97년 이후 한은 총재는 한은법 개정 투쟁으로 얻은 전리품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은 총재가 쥔 무기는 기준금리 결정권이다. 금리는 특정 산업이나 지역을 겨냥한 ‘정밀 유도 미사일’이 아니라 전 산업·전국에 영향을 미치는 ‘핵폭탄’이다. 자금시장은 물론 외환·증권·부동산·대출시장에까지 장기간에 걸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특정 산업이나 지역을 지원하는 정부의 산업·지역 정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공할 무기다.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위험하다. 이성태 전 한은 총재가 “가장 외로운 자리”라고 한 까닭이다. 물론 금리 결정은 당연직 의장인 한은 총재를 포함해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금통위가 결정한다.

12명으로 이뤄진 미국 Fed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와 달리 국내 금통위에선 한은 총재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총재를 제외한 6명 가운데 당연직인 부총재와 한은 총재 추천 위원 등 두 명이 기본적으로 한은 총재의 우군인 데다 한은 조직의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한데 97년 이후 기준금리라는 ‘핵무기’를 제대로 다룬 한은 총재는 찾기 어렵다. 한은 관계자는 “국내엔 거시경제 정책 전문가 많지 않은 데다 한은이 독립적으로 기준금리를 결정해온 역사가 짧다 보니 어느 총재든 과감하게 소신을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97년 이후 금리에 관한 한 최종 결정자가 된 것도 한은 총재로 하여금 결단을 어렵게 한 요인이 됐다. 총재의 말 한마디에 국가경제 전체가 휘청댈 수 있는 상황이 되니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버냉키가 야당인 공화당의 거센 저항과 시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그가 1930년대 대공황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새 한은 총재에게 전문성이 특별히 요구되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은 독립성 걸맞은 소신 정책 기대
게다가 지금 한국 경제가 맞고 있는 상황은 2008년 버냉키 앞에 놓였던 위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무엇보다 한은의 신뢰가 그리 높지 않다. ‘2분기에 한은이 금리를 인하할 것’이란 연초 골드먼삭스의 보고서 한 장에 국내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한은 총재의 입보다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보고서가 더 위세를 부렸다는 얘기다.

국내 경기만 보면 여전히 금리인하 압력도 강하다. 특히 15개월 연속 1% 저공비행 중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심상치 않다. 일부에선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일본이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무차별 돈을 살포하며 엔저를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Fed가 극약처방인 양적완화 정책을 거둬들이는 ‘테이퍼링(tapering)’에 나선 상황에서 한국이 금리를 인하하기도 어렵다. 자칫 섣부른 금리인하는 달러 엑소더스를 촉발할 우려도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 경제 전체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식견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유다.

여기다 새 한은 총재는 달라진 한은의 위상에 걸맞은 외교력도 갖춰야 한다. 신흥국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Fed가 테이퍼링에 이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신흥시장으로부터 달러 탈출은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미국·유럽은 이로 인한 위기를 신흥국 내부의 경제정책 실패 탓으로 몰아가고 있다. 벌써부터 신흥국과 선진국 간 신경전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 중간에서 국제 공조를 조율할 적임자는 한은 총재다.

한국은 2010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유치해 미국·유럽발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데 조정자 역할을 한 경험이 있다. 국제감각을 차기 총재의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들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중앙은행 총재에게 영어 실력이나 국제 네트워크가 꼭 필요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라며 “세계 주요 중앙은행 총재나 재무장관과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갖춘 인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경민·임미진 기자 jkm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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