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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인생, 나만의 사전을 만드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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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다른 이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가장 어렵고, 말이라도 걸라치면 몸부터 덜덜 떨려오는 남자. 영화 ‘행복한 사전’의 주인공 마지메(마쓰다 류헤이)는 내성적이고 소심하다. 출판사 영업부에서 고군분투하던 그가 갑자기 사전편집부로 발령을 받는다. 때는 1995년, 전자사전 보급이 확산되고, 젊은이들 사이에는 사전에 없는 신조어가 판을 치는 시대. 회사는 각 세대의 언어를 포괄하는 새로운 종이사전 ‘대도해(大渡海)’를 준비하는 중이다. 사전편집부로 처음 출근한 날, 마지메는 하숙집 할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저는 제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해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모르겠고. 그런 제가 사전을 만들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답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원래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걸 전하라고 말과 글이 있는 거지!”

 영화의 원작은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다. ‘말’의 망망대해에서 누군가에게 닿기를 희망하며 내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낼 단어 하나를 찾는 사람들. 이런 이들에게 사전은 ‘진심을 싣는 배’라는 멋들어진 비유다. 하숙집 할머니의 손녀에게 반해버린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을 작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그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단어를 어루만지며 차츰 소통을 배워나간다. ‘사랑 :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어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게 되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영화 ‘행복한 사전’. [사진 씨네그루]

 컴퓨터 자판 한번 두드리면 모든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 아직도 인쇄물의 ‘손맛’을 사랑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영화이기도 하다. 얇지만 쉽게 넘어가는 최적의 종이를 찾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고, 눈이 빠질 듯 교정지를 들여다보며 빨간 펜으로 오타를 수정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천천히 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아직도 책장에 꽂힌 종이사전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웹툰이 대세라지만 만화는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 제맛이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영화 초반, 사전편집부 직원들은 스카우트할 인물을 찾아다니며 질문한다. “ ‘오른쪽’이란 단어의 뜻을 말해 보라”고. 포털 사이트를 두드려 보기 전, 나라면 뭐라고 답했을까 한번 생각해보시길. 오른쪽·왼쪽·오늘·내일…, 일상을 떠다니는 단어에 대한 나 자신만의 정의를 찾아가는 것. 그래서 차곡차곡 한 권의 사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인생 아니겠느냐고, 영화는 심심하고 느릿하게 묻는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