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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보수파의 상징|비명에 간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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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비명에 숨진 「파이잘」왕은 최근 수년동안 「아랍」 세계의 정치적 「리더」였으며 세계산유국들의 지도자로서 중동 및 세계 정치 무대에 군림해 온 거인이었다.
「파이잘」왕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중동 석유 생산량의 40%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에 큰 역할을 해왔고 특히 73년 중동 전쟁 이후 「아랍」권을 단결시켜 대 서방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이른바 「오일·쇼크」를 일으키게 했으며 그로 인해 「아랍」의 존재와 정치적 발언권을 사상 유례없이 막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중동전 때 대미 단유를 서슴지 않았으나 「아랍」 세계에서 가장 확고한 미국의 친구였으며 또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스라엘」과의 이해 관계를 제외하고는 미국의 모든 정책을 지지한 철저한 친미주의자였으며 「키신저」 국무장관의 중동 평화 노력을 막후에서 후원해 왔다.
「파이잘」왕은 l906년4월13일 「이븐·사우드」왕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부왕과 함께 1926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을 건설했고 외상으로 활약했다. 53년 부왕이 죽고 그의 형「사우드」가 왕위를 이은 후 「파이잘」은 58년 수상에 오르면서 실권을 잡았다.
64년11월 「사우드」왕이 건강과 폭정을 이유로 폐위되면서 「파이잘」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형과는 대조적으로 검소하고 혁신적이었으며 즉위후 보잘 것 없는 사막의 토후국을 현대 국가로 건설했다. 석유를 개발해서 연간 석유 수입만 2백50억 「달러」가 넘고 무료 의료 제도와 대학까지의 무상 교육 제도가 실시되는 사막의 낙원을 만들었다.
「파이잘」이란 이름은 「아랍」어로 칼 (검)을 뜻한다. 그는 철저한 반 유태주의자였고 항상 「이스라엘」에 점령된 성도 「예루살렘」을 회복, 「모하메드」 사원에서 기도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었다.
회교도들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한 그가 하필이면 「모하메드」의 탄생일인 3월25일에 피살된 것은 우연한 일치인지 혹은 타고난 운명인지 모른다.
그는 회교 율법에 따라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금욕주의자였으며 노예 제도를 없애고 서방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는 한편 여성들도 교육시키는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직도 「아랍」권에서 제일 보수적인 편.
「파이잘」왕은 4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8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슬하에 두고 있다. 회교법에는 한 남자가 4명의 부인까지 둘 수 있지만 그는 한꺼번에 4명의 부인을 거느린 적은 없었다. 그는 2명의 부인과 이혼했고 1명과는 사별했으며 현재의 부인인 「이파트」왕비와는 근 40년간 결혼 생활을 해왔다.

<외신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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